[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잘못된 상식이지만 워낙 흥미로워서 SF 작품에 자주 쓰이는 설정 중 ‘인간은 뇌의 10%만 사용한다’가 있다. 그렇다면 100%를 사용하는 인간은 어떻게 될까? 많은 작품은 지능이 높아지는 걸 넘어 초능력이 생긴다는 식으로 묘사하곤 한다.
비슷한 상상으로, 축구선수가 하루를 실력 향상에 다 쓴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에는 하루 종일 훈련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스포츠 의학이 발달한 뒤 팀 훈련과 개인 훈련을 모두 더해도 3시간 이상 훈련하는 선수는 드물다. 평범한 사람들의 법정 근무시간 8시간에 비하면 굉장히 짧다. 시간을 기준으로 볼 때 노동 강도가 굉장히 낮은 직종이다.
서민우는 그 상상을 현실로 실현시키고 있는 선수다. 훈련 외의 시간도 실력 향상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선수라고 하면 흔히 몸 관리를 위한 철저한 식단, 각종 첨단장비와 마사지를 통한 관리, 전술 연구 정도를 떠올린다. 그런데 서민우는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선수로 유명해졌다. 단순히 권장 식단을 따르는 걸 넘어 스스로 생리학을 연구해 몸에 맞는 최선의 영양섭취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축구에 대한 전술적 고민은 뇌과학과 연결시켰고, 심지어 심리학과 고전 독서조차 축구에 도움이 되게 쓴다.
이런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도 만들어냈다. 청소년 대표 출전 경력이 아예 없었던 “비주류 선수”가 올해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서민우의 실력은 3년 전에 비해 확실히 늘었다. 그렇다면 그가 ‘월드컵 승선을 위한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할 때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서 교수님’의 연구와 노력을 다른 선수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참고로 너무 어려운 내용은 뺀 게 이 정도다.
▲ 더 노력하는 선수가 된 이유, 축구선수라는 거 편하더라
서민우가 더 다양한 공부를 하는 선수 된 계기는 김병수(현 대구)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영남대 축구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구선수의 삶은 널널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릎 수술로 훈련을 쉬었던 시기가 있어요. 인생을 바꿔보려는 생각에 매일 아침 6시마다 학교 도서관에 갔죠. 그런데 제가 1등이 아닌 거예요. 매일 5명 정도는 나보다 먼저 나와서 이미 공부 중인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때 많이 깨달았죠. 제가 축구선수 중에서 조금 더 노력한다 해도, 공부해서 취직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 시간이 짧다는 걸.”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다. 정신분석학의 시조 중 한 명인 카를 융의 책을 해설서가 아니라 두꺼운 학술서로 읽었다. 이어서 펼쳤던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인생 책’으로 남아 있다. 이때부터 고전과 인문학 서적까지 읽고, 이를 축구에 접목시키는 서민우의 특이한 방식이 시작됐다.
▲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배운 동기부여의 중요성
서민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꼽는 책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전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다. 과거 여러 인터뷰에서 거론한 작품이지만, 이번에 서민우는 차근차근 그 의미를 설명하려 했다. “작품에 나오는 고도(Godot)가 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아요. 다만 등장 인물들이 수십년 동안 그 고도를 기다리거든요. 오늘은 온다더라, 아니다 내일은 온다더라, 하면서 계속 기다리는데 못 만나요. 그게 뭔지 계속 생각했어요. 제 생각에는 희망이에요. 그런 희망이 삶의 원동력인 거죠. 저만의 고도를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다만 고도는 추상적인 개념이니까 손에 잡힐 것 같은 목표를 설정해서 동기부여를 하는 식으로 적용했어요. 국가대표가 된다, 유럽에 나간다, 이런 성과적인 목표도 있고요. ‘에너지 레벨이 높은 선수가 된다’라는 기술적인 목표일 수도 있죠.”
▲ 30개월 프로젝트의 의미
베케트의 희곡에서 배운 삶의 원칙을 실제로 어떻게 적용했는지는 서민우의 30개월 프로젝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올해 여름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된 뒤 “태극마크를 목표로 30개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지금이 딱 30개월 되는 시점”이라고 말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왜 하필 30개월이었을까? 서민우는 김천상무 입대 계획을 1년 미루고 강원FC에서 더 뛰다가 군대에 갔다. 1년 뒤 입대한다는 생각을 하자 프로에서 동기부여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입대 전 12개월, 군생활 18개월을 더해 30개월 동안 실력을 향상시키겠다고 정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에너지 레벨을 올리는 거였어요. 프로젝트 시작 직전인 2022년 말, K리그 시즌을 마치고 월드컵 경기를 전부 다 봤어요. 잘 하는 팀들은 에너지 레벨이 높더라고요. 저는 이미 활동량으로는 최대 14km까지 뛰는 상위권 선수였어요. 그런데 스프린트 횟수가 적으니까 사실 마라톤 선수나 다름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로드리고 데폴을 보는데 저와 비슷한 활동량이 찍히면서 스프린트 횟수와 거리가 엄청난 거예요. 에너지 레벨이 화두다, K리그도 몇 년 늦게 이 화두를 따라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늘 조언을 구하는 두 명, 에이전시의 어드바이저와 은사인 김병수 감독님께 연락했어요. 감독님도 에너지 레벨이 중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 에너지 레벨을 올리려면? 장 건강 개선과 알레르기 검사부터
보통 에너지 레벨을 올리기 위해 하는 훈련은 말 그대로 지구력과 회복력을 위한 운동장에서의 행위다. 서민우도 물론 체계적인 운동을 했다. 하지만 나머지 시간에도 몸 생각을 했다는 게 그의 특징이다. 그는 해외 논문까지 찾아가면서 몸 관리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다 ‘에너지 레벨이 높은 선수가 되려면 장 건강부터’라는 특이한 결론에 도달했다.
“남들보다 많이 훈련할 순 있어요. 근데 몸이 그걸 버텨야 되잖아요. 왜 누군 버티고 누군 못 버틸까? 이 생각을 하다 보니 면역과 염증부터 관리해야 하더라고요. 면역력과 장이 직결된다는 연구 결과를 찾았어요. 그 뒤에는 장 건강까지 고려한 식단을 많이 만들었어요. 군대에서는 배식받은 대로 먹어야 하니 좀 힘들었지만 장 건강에 맞춘 주스, 식이섬유, 오일, 소금물, 비타민, 유산균 등을 조합한 방법을 만들었어요. 혼자 하면 틀릴 수도 있으니까 뛰어난 영양학 교수님과 미팅을 잡아서 조언을 구했죠. 그래서인가? 군대에서는 꼭 아침에 깨우잖아요. 원래 다른 선수들처럼 일어나서 구보하는 게 힘들었는데, 장 건강 맞춤형 식단을 완성한 뒤에는 새벽이 아주 개운하더라고요.” 데이터로 확인해 봤더니, 실제로 뛰는 강도가 많이 높아졌다.
서민우의 식단은 논리적이다. 경기 중 사고로 발생하는 부상은 어쩔 수 없지만, 근육 염증은 선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서민우는 정기적으로 알레르기 검사를 받는다. 보통 사람들은 약한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식품은 그냥 먹고 산다. 반면 서민우는 축구선수로서 알레르기 유발식품이 염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고려했다. 마늘 알레르기가 있다는 결과를 받자, 한국 사람이 마늘을 끊었다. 밖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마늘이 없는 다양한 식단을 개발해 가능하면 집에서 해 먹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민우는 요즘 소변 검사 키트를 이용하는데, 이 앱이 개발되기 전에는 염도계를 군대에 들고 들어가서 혼자 소변을 받고 이를 검사할 정도로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 했다. 어떤 무기질이 부족한지도 검사해 봤는데, 비타민 D가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햇빛 속 자외선을 쬐면 저절로 합성되는 비타민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 년 전 개발된 비타민 생성용 자외선 조명을 집에 구입했다. 마치 태닝하듯이 그 조명 앞에 서서 화면 거치대로 축구를 보는 게 몸 관리 루틴의 일부다.
▲ 월드컵까지 12개월 동안 진행하는 ‘뇌과학 프로젝트’
30개월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서민우는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됐다. 이때가 북중미 월드컵까지 약 1년 남은 시점이었다. 이번엔 12개월 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했다.
장 건강과 알레르기까지 신경 써 가며 몸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면 이제 두뇌를 개선할 차례였다. 더 늘어난 스프린트 횟수를 가장 적절한 상황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미드필더의 덕목인 스캐닝 능력을 개선해야 했다. 약 20년 전 차비 에르난데스가 공을 받기 전 고개를 몇 번 돌리느냐가 화제를 모았던 것처럼, 보통은 공을 가질 때의 스캐닝이 주로 화두에 오른다. 서민우는 이와 동시에 수비 상황에서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최상의 위치로 스프린트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효율적인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되기 위해서다.
“스캐닝의 중요성은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에서 많이 느꼈어요.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본 선수들은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저는? 대부분 잘 처리했지만, 한 경기에 두어 장면은 당황해서 백패스를 했어요. 일본 미드필더들은 국가대표가 아닌데도 그럴 때 주변 상황을 파악해서 공을 갖고 나오거든요. 일단 스캐닝에 대해 전술적인 공부와 훈련장에서의 노력을 계속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잘 아는 서울대 대학원생의 도움을 받아서, 뇌 MRI을 찍으며 정보를 처리할 때 어떤 부분이 얼마나 활성화되는지도 기록했어요. 사실 지금으로선 해석이 잘 되지 않지만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면 이 영상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일단 제가 공간 등의 정보를 처리하는 뇌가 남들보다 더 크게 활성화된다는 건 알게 됐고요.”
▲ 뇌과학으로 설명하는 명상의 이유
서민우는 명상하는 축구선수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 명상은 끝났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건 예전과 같지만, 생각을 비우는 명상이 아니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생각을 꽉 채운다. “멘탈적인 문제를 겪었을 때 뇌과학 공부를 많이 했어요. 같은 행동과 생각을 반복하면 해당 뉴런이 굵어지고, 그러면 뇌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자극에 대한 적합한 반응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게 돼요. 자동화가 되는 거죠. 다만 축구는 경기장 위 상황이 복잡한 스포츠라서 단순한 자동화로는 부족해요. 경기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훈련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대학 시절 은사 김병수 감독은 작전판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 감독이 스캐닝을 강조하자, 서민우도 김 감독을 따라 작전판을 하나 샀다. 그리고 바둑알처럼 생긴 자석들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경기를 풀어나갈지 생각하는 게 실력향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 시각 자료의 도움을 받은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그리고 단계를 높인 결과 눈을 감고도 경기장 상황을 그려낼 수 있는 나름의 경지에 도달한 셈이다.
▲ 분석하는 선수 서민우, 국가대표에서 깨달은 더 보완할 점은
처음 프로에 왔을 때는 김병수 감독의 인맥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신체조건도 테크닉도 평범했던 게 사실이다. 서민우 스스로도 한때 재능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재능이 두뇌에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연구하려는 성향, 또한 감독에게 배운 것과 스스로 연구한 것을 빠르게 몸에 흡수시키는 습득력이 내 재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축구 인생에서 첫 결정적 순간으로 중학교 때 “펩 과르디올라의 축구를 본 것”을 꼽는다. 저런 축구가 있다는 걸 안 뒤에 같은 경기를 풀타임으로 4회 반복 시청했다. 전체적으로 한 번, 펩이 됐다고 생각하면서 한 번, 상대팀 감독의 입장에서 한 번, 마지막으로 차비의 관점에서 한 번 봤다. 이때부터 전술 공부가 일상이 됐다. 고등학교 때는 100일간 하루 한 경기 챌린지를 했다. 요즘도 매일 45분 이상 축구 영상을 보는 게 루틴이다.
자신의 훈련 영상도 팀에 요구해 계속 전달받는다. 2테라바이트 용량의 외장하드에 영상들을 차곡차곡 받아 놓고 스스로 리뷰한다. 그래서 국가대표팀 소집 이후에도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분석했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선수와 함께 소집됐을 때, 과연 대표팀 훈련에서 내가 뭘 느낄지 궁금했어요. 경기장을 넓게 쓰는 훈련에서 제가 의외로 잘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좁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훈련이었어요. 템포와 압박 강도가 올라가자 실수가 너무 많았던 거죠. 당시에는 ‘넓은 훈련은 잘 했으니까’라고 정신승리를 했지만 영상을 다시 보자 부족한 점을 분석할 수 있었어요. 옌스, 백승호 등 기존 미드필더들과 차이가 났어요. 그래서 알게 됐죠. 국제무대에서 높은 템포를 소화해 온 선수와 아닌 선수의 차이를요. K리그보다 더 템포가 높은 ACLE 일본팀과의 경기에서 그 감각을 깨워보려고 좀 더 집중했어요. 유럽 진출에 대한 꿈을 더 강하게 꾸게 한 계기이기도 했고요.”
홍명보 감독은 대표팀 선발 우선순위가 확실한 편이다. 서민우는 현재 대표팀 선수풀에는 들어 있지만, 주전들이 여럿 이탈했을 경우에만 출장 기회가 주어지는 후순위 선수다. 월드컵 승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되 비교적 낮은 그룹에 속한다. 서민우는 도전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앞으로 월드컵까지 더 발전하기 위해 가장 체계적으로 노력하는 미드필더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우상향 미드필더는 유럽을 꿈꾼다
20대 후반에도 계속 기량을 발전시키는 서민우의 실력 그래프는 꾸준한 우상향이다. 병역의 의무를 다한 지금 유럽에 대한 꿈을 꾸는 것도 그래서다. “2021년 즈음부터 제 수익의 일정 비율을 실력향상에 재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유럽파도 아니면서 개인 트레이너를 미리 물색하면서, 주변에 ‘나 유럽 갈 거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국가대표에 왔잖아요. 월드컵뿐 아니라 유럽에 도전 정도는 해볼 만 해요. 더 높은 레벨의 축구를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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