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임나래 기자] 여당이 금융사의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제’ 법제화에 나섰다. 기존 은행권 자율배상제가 낮은 배상률과 엄격한 과실 기준으로 실효성 논란을 빚자, 금융권 책임을 제도적으로 확대하려는 취지다. 피해자 보호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과실책임 원칙을 훼손하고 금융권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장 충격 완화 사이에서 제도적 균형점을 찾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금융사 ‘무과실 배상’ 추진…정부, 보이스피싱 대응 전면화
더불어민주당 보이스피싱 태스크포스(TF)는 지난 23일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공개했다. 비대면 금융사기 피해가 발생하면 금융사의 과실 유무와 관계없이 일정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피해자 계좌를 관리한 금융사와 사기 이용 계좌를 제공한 금융사가 배상액을 절반씩 부담한다. 1인당 보상 한도는 최대 5000만원이다. 은행뿐 아니라 저축은행, 상호금융, 증권사 등 전 금융권이 적용 대상이다. 다만 금융사가 사전에 명확한 경고를 했거나 허위·부정 청구로 확인된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하는 조항을 뒀다.
◇자율배상제 한계 노출…과실 기준이 발목
은행권 자율배상제는 2024년 1월 도입됐지만 기대만큼 작동하지 못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8월까지 5대 은행에 접수된 배상 신청 173건 가운데 실제 배상으로 이어진 사례는 18건에 그쳤다. 신청 대비 배상률은 약 10% 수준이다. 전체 보이스피싱 상담 건수(2135건)와 비교하면 1%에도 못 미친다.
과실 인정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지적이 반복됐다. 금융사가 명백한 절차 위반을 하지 않은 이상 피해 보상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번 개정안은 금융회사 자율에 맡겼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제도적 강제력을 통해 피해 구제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다. 보이스피싱을 개인 부주의로만 돌리기 어렵다는 문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피싱 막으라더니 배상까지”…금융권 부담 확대
금융권은 무과실 배상책임제 논의에 긴장하고 있다.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 등 예방 조치를 지속해왔지만, 피해 보상까지 의무화할 경우 부담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사의 귀책이 명확한 경우에는 이미 배상에 나서고 있다”며 “다수의 보이스피싱은 고객이 직접 이체하거나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발생해 금융사가 개입하기 어려운 영역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고의와 중과실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며 “적용 범위가 과도하게 넓어질 경우 비용 부담이 금융사에 집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비자 보호·시장 충격 최소화가 관건
경찰청 보이스피싱 통합대응단에 따르면 올해 1~10월 누적 피해액은 1조566억원으로, 연간 기준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개인의 주의만으로는 피해를 막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도 도입의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금융권 전반에 미칠 비용 부담과 시장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지가 관건이다. 은행뿐 아니라 카드사·증권사 등 비은행권까지 포함하는 책임 분담 구조와 합리적인 보상 한도 설정이 핵심 쟁점으로 꼽힌다.
TF는 오는 30일 당정 협의회를 열고 적용 범위와 방식, 보상 한도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소비자 보호 효과를 살리면서도 금융시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는 절충안을 도출할 수 있을지가 제도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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