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 굴뚝이 아니라 5층 계단을 탔다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샷!] 굴뚝이 아니라 5층 계단을 탔다

연합뉴스 2025-12-28 06:30:02 신고

3줄요약

크리스마스이브 영등포서 '산타' 봉사 체험

취약계층 아동 찾아 초인종 누르고 '선물 배달'

얼굴 화끈거렸지만 민망함 참고 열심히 춤춰

아픈 아이 집 앞에는 장난감 선물 두고와

집 현관 앞에 놓아둔 선물들 집 현관 앞에 놓아둔 선물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취약계층 아동의 집 현관 앞에 놓아둔 선물들. 2025.12.28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엘리베이터가 없는 다세대주택이었다.

선물이 가득 담긴 빨간 자루를 어깨에 메고 숨을 고르며 5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꽤 묵직한 자루 무게에 어깨가 뻐근해졌다.

'목적지' 앞에 다다르자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문밖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던 듯 했다.

열린 문 안쪽에는 기대와 설렘을 얼굴에 한가득 채운 꼬마 3형제가 서 있었다.

배운 대로 다른 '산타' 5명과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이어 휴대전화로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All I Want for Christmas) 노래를 틀고 율동을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민망함을 참고 1분여간 춤을 열심히 췄다.

노래가 끝난 뒤 꼬마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자루에서 선물을 꺼내 전달했다.

"내가 원하던 로봇이다!", "엄마, 우리 집 선물 부자 됐어!"

그래, 이 맛에 산타를 하는 모양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지난 24일 난생처음 해본 산타 일일 체험은 이렇게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맞춰 율동하는 봉사자들 크리스마스 캐럴에 맞춰 율동하는 봉사자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기 전 캐럴에 맞춰 율동하는 봉사자들. 2025.12.28

앞서 이날 오후 4시 영등포청소년문화의집 앞에는 '산타' 50명이 모였다.

관내 취약계층 가정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사회 공헌 활동인 '겟 투게더'를 위해 모인 자원봉사자들이다. 대여섯명씩 조를 이뤄 총 60명의 아동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 사이에 끼어 붉은 산타 망토와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산타로 변신했다.

산타 업무 매뉴얼은 구체적이었다.

'목적지' 도착 10분 전 '대장 산타'가 수혜 아동·청소년의 보호자에게 연락하고, '부장 산타'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면 모두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 "산타가 왔습니다"를 외치고, 캐럴에 맞춰 율동을 선보인 뒤 선물을 전달한다. 이어 다시 한번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퇴장하는 것이 일련의 순서였다.

'부장 산타' 역할을 맡았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것도 부장 산타의 몫. 중책이다. 혹시라도 순서를 놓칠까 긴장이 됐다.

단순히 선물을 건네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주는 역할이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출발을 앞두고 선물들을 차로 옮겼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보호자를 통해 사전에 확인해 예산에 맞춰 준비한 것들이다.

필기구 세트와 로봇 장난감, 케이크와 라면 박스, 과학 키트 등이 차 트렁크에 속속 실렸다.

오후 6시, 썰매가 아닌 승합차에 몸을 싣고 산타들이 출발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취약계층 아동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모습. 2025.12.28

꼬마 3형제를 만난 후 두 번째 목적지에 도착하니,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과 책임감이 배로 커졌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산타 방문을 아이들에게 비밀로 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산타 6명이 '짠'하고 등장하자 꼬마 자매가 깜짝 놀라 잠시 얼어붙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캐럴에 맞춰 율동을 선보였다. 부끄러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이들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게 보여 율동을 멈출 수 없었다.

선물을 전달하자 한껏 신이 난 아이들은 곧바로 포장을 뜯으며 즐거워했다.

환한 얼굴로 선물을 끌어안은 채 배웅하는 자매의 모습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취약계층 아동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모습. 2025.12.28

세 번째 집으로 향하던 중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장염에 걸려 직접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차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어두운 주택가 골목을 따라 선물 자루를 들고 걸어가 집 앞에 장난감·라면·케이크 등을 함께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비록 이번에는 아이가 산타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닿기를 바라며 다음 집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크리스마스 선물 전달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취약계층 아동에게 기자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2025.12.28

마지막 집에는 산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있었다.

오후 8시쯤 신길동 번화가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가로등 하나만 켜진 어두운 주택가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계단이었다. 선물 자루를 어깨에 메고 4층을 오르니 절로 숨을 한 번 더 고르게 됐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열린 현관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설렘이 한꺼번에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율동을 한 뒤 '변신 공룡 장난감'을 전달하자 아이는 선물을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한동안 놓지 않았다. 산타들이 계단을 모두 내려갈 때까지 아이는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긴 산타 주머니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긴 산타 주머니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24일 취약계층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긴 산타 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 2025.12.28

밤 9시 임무를 무사히 마치자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산타 복장을 벗은 뒤에도 마음 한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휴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의 하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혜경 영등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은 "오늘 아이들에게 전달한 선물은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들을 기억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쪽은 어쩌면 아이들이 아니라 산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산타 체험이었지만 누군가의 기다림에 응답했다는 기억은, 이 겨울이 지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minjik@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