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범(53)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이 항소심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받았다. 그러나 실형을 피하지 못한 이번 판결은 한국 재벌의 고질적인 사적 유용 관행과 현대적 경영 판단의 법적 경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재판부는 현대자동차 협력사 리한 대여금 등 경영적 사안에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슈퍼카 이용 등 개인적 비리에는 무관용 원칙을 고수했다. 한마디로 재판부는 총수 부재라는 경영 공백의 무게보다 사법 정의의 실현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2025년 12월 22일 오후,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형사법정의 공기는 차가웠다. 피고인석에 앉은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은 재판장인 서울고법 형사13부 백강진 부장판사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던 그에게 이번 항소심은 경영 복귀의 가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승부처였다.
재판부는 조현범 회장의 혐의 중 가장 무거웠던 리한에 대한 50억 원 대여 행위를 무죄로 뒤집으며 형량을 1년 감경했다. 하지만 판결의 끝은 석방이 아닌 재구금이었다. 재판부는 경영인의 재량이라는 방패 뒤에 숨겨진 사적 유용의 칼날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번 판결은 한국 타이어 산업의 상징인 조현범 회장에게 혁신가라는 칭송과 사적 이익을 탐한 구시대적 총수라는 오명을 동시에 씌웠다.
혁신가와 구태경영인의 두 얼굴
한온시스템의 인수와 슈퍼카 5대
조현범 회장은 한국앤컴퍼니그룹 내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그는 단순한 타이어 제조를 넘어 자동차의 감성을 디자인하는 마케팅 중심 경영을 펼쳤다. 2025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본상을 수상한 웨더플렉스 GT 사례는 조현범 회장의 디자인 경영 철학이 낳은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는 평소 임원들과의 소통에서도 격식을 파괴했다.
2025년 2월 정식 출범한 인공지능 단톡방(IAA)은 조현범 회장의 피드백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이 단톡방에 참여한 한 임원은 기존 보고서 기반의 내부 회의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솔직한 토론이 가능하며 형식과 권위가 삭제된 진짜 학습 조직에 동참하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조현범 회장은 이 채팅방에서 한온시스템 등 그룹 전 계열사 임원들도 함께 소통하자며 참여 범위 확대를 직접 제안할 정도로 수평적 리더십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세련된 리더십의 이면에는 회삿돈을 개인 금고처럼 여긴 낡은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조현범 회장의 회사 자산 유용 내역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계열사 명의로 페라리 488 피스타, 포르쉐 타이칸 터보 S, 포르쉐 911 타르가, 테슬라 모델 X, 그리고 희소성 때문에 실제 거래 가격이 10억 원을 상회하는 포드 GT 등 총 5대의 슈퍼카를 운용했다. 이 차량들의 총 이득액은 약 12억 7000만 원에 달했다. 조현범 회장의 변호인은 법정에서 프리미엄 타이어 시장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회장이 직접 차량을 운행하며 성능을 시험하고 개발 방향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조현범 회장 역시 제품 테스트 차원에서 회사 차량을 탔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재판장인 백강진 부장판사는 이 대목에서 날카로운 의문을 던졌다. 조현범 회장이 제품 테스트 차원에서 회사 차량을 탔다는데 왜 회사에 그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하나도 없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한 그는 테스트 결과가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 정보였다면 그의 소감이나 품평에 그쳐선 안 되고 구체적인 업무 지침으로 내려왔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이 차량들이 계열사 직원의 업무용으로 사용된 사례는 단 5~6회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기록 없는 테스트 드라이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조현범 회장의 배임 혐의를 유죄로 확정했다. 여기에 법인카드 5억 8000만 원 유용, 부인 전속 운전기사 급여 대납, 개인 주택 인테리어 및 가구 구입비 2억 6000만 원 회삿돈 지출 등은 조현범 회장의 경영 철학이 가진 진정성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했다.
법치주의가 묻는 경영 판단의 실체
"기록 없는 테스트 드라이빙은 없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서 법률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현대자동차 협력사인 리한에 50억 원을 대여해준 행위를 무죄로 판단한 지점이다. 1심은 이를 적절한 채권 회수 조치 없는 부당 지원으로 보았으나, 백강진 부장판사는 경영 판단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재판부는 리한의 화성공장에 설정된 우선매수권이라는 비전형적 담보에 대해 실질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당시 화성공장은 선순위 채권을 제외하고도 약 100억 원의 담보 가치가 상존했으며, 4.6%라는 이자율 역시 당시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불합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이 아니더라도 일반 회사가 여유 자금을 활용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있으며 이사회 결의를 비롯한 모든 절차를 준수한 이상 이를 배임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법리는 조현범 회장에게 1년의 감형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한국 재벌 총수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공적 절차를 거친 경영적 결정은 보호하되, 절차를 생략하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사적 유용은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다.
조현범 회장은 지인의 청탁을 받고 계열사의 항공권 발권 업무를 특정 여행사로 일원화하도록 지시한 배임수재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를 면치 못했다. 재판부는 조현범 회장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따라 발권 업무가 일원화된 것은 경영상의 효율성보다는 총수의 사적인 관계가 우선된 결정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1심 선고 직후 판사님께서 정해주신 형량대로 반성하고 있겠다고 짧게 언급했으나, 항소심에서도 실형이 유지되자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남기지 못한 채 다시 구치소로 향했다.
조현범 회장의 부재는 한국앤컴퍼니그룹에 거대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특히 그룹의 명운을 걸고 추진 중인 4조 6000억 원(약 34억 달러) 규모의 차입금을 수반한 한온시스템 인수 후 통합 작업(PMI)은 리더십 공백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한온시스템은 조 회장이 3년 안에 경영 정상화를 이루겠다고 공언하며 직접 전략 회의를 주재하던 핵심 사업이다. 현재 그룹은 박종호 사장과 안종선, 이상훈 사장 등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와 전기차 시장의 수요 정체(캐즘) 국면에서 총수의 전격적인 투자 결정이나 사업 재편은 사실상 멈춰 선 상태다. 관련 업계에서는 조현범 회장의 구속 상태 유지가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 전체의 경쟁력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결국 조현범 회장의 사례는 한국적 지배구조가 가진 명과 암을 동시에 투영한다. 강력한 총수의 리더십이 한온시스템 인수와 같은 빅딜을 성사시키고 디자인 혁신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권력이 견제받지 않을 때 회삿돈으로 슈퍼카 컬렉션을 구축하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조현범 회장이 뒤늦게나마 잘못을 깨닫고 준법 경영 시스템을 마련한 점은 긍정적이나 총수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 점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저해하는 행위라고 일갈했다. 형기를 마친 후 조현범 회장이 경영에 복귀할 때, 시장은 그가 IAA에서 보여준 디지털 혁신가의 모습뿐만 아니라 재판장에서 백강진 판사가 요구한 높은 수준의 준법 의식을 실제로 증명해낼 수 있을지를 엄격히 묻게 될 것이다. 조현범 회장의 실형은 한 경영인의 몰락을 넘어, 한국 기업들이 진정한 글로벌 리딩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법치라는 문턱의 높이를 상징하고 있다.
조현범 회장은 누구?
아버지는 조양래(한국앤컴퍼니 명예회장, 한국타이어그룹 창업주 조홍제의 차남), 어머니는 홍문자다. 형제는 큰누나 조희경, 작은누나 조희원, 형 조현식이며, 할아버지는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다. 조현범 회장은 한국앤컴퍼니 회장으로, 서울 경복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드와이트-엥글우드 스쿨(고등학교)을 거쳐 보스턴 칼리지에서 재정학과(경제학 학사)를 취득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로 알려져 있으며, 1998년 한국타이어 입사 후 마케팅본부장, 경영기획본부장 등을 거쳐 CEO와 회장으로 승진했다. 한국타이어에서 해외 공장 투자와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을 통해 글로벌 타이어 기업 6위로 끌어올렸다. 아우디, 벤츠 등 주요 완성차 업체에 OE 타이어 공급을 성공시키며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2025년 5월, 20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계열사 부당지원과 관련된 사법 리스크가 지속되고 있다. 한편 이번 항소심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받았지만, 약 8개월의 잔여 형기를 더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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