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한국 방문, 아버지의 '침묵'은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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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의 한국 방문, 아버지의 '침묵'은 두려움이었다

프레시안 2025-12-27 14:27: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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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다. 반에 한국인 여학생은 둘, 나머지 열 명은 모두 유럽 출신이었다. 타이포그래피 워크숍에 한국인 강사가 초청되었는데, 그녀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때 선생님은 대화를 통역하자는 생각을 했고, 당연하다는 듯 반의 유일한 '진짜 한국인'인 내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에게 부끄럽고 화가 났다. 나 자신도 다른 학생들처럼 '유럽 쪽'에 서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인 한국어를 들으며, '또 다른 세상에서는 내가 통역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엘레니, 24살이고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리스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그리스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리스 명절을 기념하고, 그리스 음식을 먹고, 자주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정기적으로 그리스를 방문했다. 아버지 역시 그리스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다.

아버지는 벨기에 가정에 입양된 한국인이었다. 아버지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갈등이 잦았고 건강하지 못했다. 반면, 아버지는 부모님의 친자녀였던 누나들과는 조금 더 나은 사이였다. 아버지의 입양은 가족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늘 그의 외모를 언급하며, 그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때로는 단순한 관찰처럼, 때로는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또 때로는 인종차별적 농담에 싸인 잔인한 말로.

아버지는 나와 이 문제를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 침묵을 되풀이했다. 정체성의 문제는 1세대에서 끝났다고, 그것은 더 이상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일찍이 깨달았다. 이 주제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꺼내는 순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 상처를 남길 뿐이라는 걸.

나는 한국 문화를 접하며 자라지 않았다. 사실 알지도 못했다. 어릴 적 한국어를 들어본 적도,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도, 한국 음악을 들어본 적도, 한국 역사를 배운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말할 때면 내 정체성이 깊이 부정 당한다고 느꼈다. 특히,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나보다 더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때는 더욱. 스스로 한국 문화를 탐구할 권리가 없다고 느꼈지만, 그 욕망은 늘 내 안에 있었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스로 질문을 던졌고, 내 정체성의 일부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 사이의 침묵은 여전했다. 그 침묵이 깨진 건 2023년, 내가 서울에서의 교환학생을 위해 한국에서 6개월을 살 기회를 얻으면서였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 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부모님께 한국에 간다고 말해야 했고,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아버지는 매우 놀라고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한국으로 나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1975년 출생 이후 처음으로 향하는 한국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아버지의 입양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거부라기보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고, 우리가 함께여서 아버지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국에서 몇 달을 지낸 나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대중교통, 음식 등 모든 활동에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의지했고, 나는 이런 생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의지할 수 있고, 이제는 내가 자라 '우리 한국 문화'에 대해 그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행정 절차를 모두 처리했고, 기관과의 약속을 잡았으며, 아버지는 그저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에게 필요했던 건 단지 손을 잡아줄 누군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나는 아버지와 입양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무 섬세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씨앗을 심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가 이 주제에 대해 스스로도 관련 있다고 느끼는지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동안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각자 이번 여행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마음속으로 깨달으며 순간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 그의 오랜 비밀스러운 꿈이었고, 여러 이유로 감히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제 딸과 함께 와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걸 아버지를 위해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이 여정을 함께할 수 있도록 나를 믿어주고, 무엇보다 함께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에 닿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입양인의 자녀들이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부모와 상관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리가 당연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역사를 마주하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자식 세대까지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입양인이 뿌리를 찾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들에게까지 당연한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을 방문한 아버지의 모습. ⓒ필자 제공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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