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펼치면 1807년 영국 노예무역 폐지의 영웅으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가 등장한다. 국회의원이었으니까. 웅변이 뛰어났으니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으니까. 그런데 정작 20년간 영국 전역을 누비며 증거를 수집하고, 2만 명의 선원을 인터뷰하고, 1200개 지부를 조직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1760–1846)이다.
논문 한 편이 인생을 바꾸다
1785년, 스물다섯 살 클락슨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논문대회에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주제는 라틴어로 "타인을 의지에 반하여 노예로 만드는 것이 정당한가?"였다. 별생각 없이 시작한 연구였다. 그런데 미국 퀘이커교도 앤서니 베네제(Anthony Benezet, 1713–1784)의 '기니 역사 서술'을 읽는 순간, 그의 세계관이 무너졌다.
우승은 했다. 하지만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말에서 내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끔찍한 일을 멈추게 하는 것이 누군가의 의무라면, 그건 바로 나의 의무가 아닐까?" 목사가 되려던 청년은 그날 인생 항로를 180도 바꿨다. 아, 물론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다만 설교단 대신 항구로 보냈을 뿐이다.
발로 뛰는 저널리즘의 원조
클락슨의 방식은 단순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모은다. 그는 브리스톨, 리버풀, 런던 항구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증언을 수집했다. 선원들로부터 노예선의 실상을 들었고, 때로는 친노예무역 세력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리버풀 부두에서는 실제로 습격당할 뻔했다.
그가 수집한 증거물은 가히 박물관급이었다. 노예를 묶는 쇠사슬, 손가락 조이개, 강제로 입을 벌리는 도구, 낙인찍는 인두까지. 하지만 클락슨의 천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산 상품도 함께 전시했다. 정교하게 조각된 상아, 짜임새 있는 직물, 향료들. 메시지는 명확했다.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야만인 취급하며 노예로 팔 수 있는가?"
오늘날 말로 하자면, 클락슨은 데이터 시각화와 감성 마케팅을 동시에 구사한 셈이다. 1788년에 말이다.
윌버포스를 찾아낸 진짜 주인공
1787년, 클락슨은 노예무역 폐지 위원회를 공동 창립했다. 12명 중 9명이 퀘이커교도였고, 성공회 신자는 클락슨,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 1735–1813), 필립 샌섬(Philip Sansom) 셋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국회에 대변인이 필요했다.
클락슨은 자신의 케임브리지 동창이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1759–1806)를 통해 윌버포스를 영입했다. 윌버포스는 웅변가였고, 부유했으며,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다. 완벽한 국회 대변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설문을 채운 자료는? 모두 클락슨이 수집한 것이었다.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클락슨을 "도덕적 증기기관"이라고 불렀다. 윌버포스가 국회에서 연설하는 동안, 클락슨은 400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국 1200개 지부를 조직하고 있었다. 1792년에는 519개의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30만 명이 노예노동으로 생산된 설탕 불매운동에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 대중운동의 원형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 기억되지 않는 이름
1807년 2월 23일, 드디어 노예무역 폐지법이 하원을 통과했다. 찬성 283표, 반대 16표. 의원들은 윌버포스를 향해 세 번 환호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화로 만들 만하다. 실제로 2006년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이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그 순간 클락슨은 어디 있었을까? 그는 이미 1794년 과로로 쓰러져 잠시 은퇴했었다. 그래도 1807년에는 현장에 있었다. 단지 조명이 그를 비추지 않았을 뿐이다.
역사는 참 야속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윌버포스는 오늘날까지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의 후손은 성공회 고위 성직자가 됐다. 반면 클락슨은? 1846년 9월 26일, 서퍽주 플레이포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86세였다. 그가 수십 년간 모은 자료들, 그가 쓴 팸플릿들, 그가 조직한 1200개 지부들. 그 모든 것이 윌버포스의 연설을 빛나게 했다.
물론 1996년에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의 기념패가 설치됐다. 윌버포스와 스탬퍼드 래플스(Stamford Raffles, 1781–1826) 동상 사이에. 150년 늦은 기억이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래도 멈추지 않은 사람
클락슨은 1807년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1808년 그는 2권짜리 방대한 저서 '영국 국회에 의한 아프리카 노예무역 폐지의 기원, 진행, 성취의 역사'를 출판했다. 1816년에는 동생 존(John Clarkson, 1764–1828)과 함께 영구보편 평화증진협회를 공동창립했다.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1823년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반노예제 협회가 창립되자, 그는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1840년, 80세의 클락슨은 런던에서 열린 세계 반노예제 대회의 개회 연설자로 나섰다. 화가 벤저민 헤이든(Benjamin Haydon, 1786–1846)은 이 역사적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다. 팔을 높이 든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금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려 있다.
1846년, 그는 탈출 노예 출신 미국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를 영국에서 접대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싸웠다.
오늘날 우리에게 묻다
토마스 클락슨의 이야기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를 기억하는가? 연설하는 사람인가, 자료를 모으는 사람인가? 무대 위의 사람인가, 무대 뒤의 사람인가? 선출직인가, 활동가인가?
클락슨은 2만 명을 인터뷰했다. 영국 전역을 말 타고 돌아다녔다. 목숨을 걸었다. 과로로 쓰러졌다. 86년 인생의 대부분을 이 일에 바쳤다. 하지만 역사책 한 줄 차지하기도 어렵다. 반면 윌버포스는 국회에서 멋진 연설 몇 편으로 영웅이 됐다.
물론 윌버포스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도 20년간 국회에서 끈질기게 싸웠다. 협박과 비난을 견뎠다. 그의 역할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회변화는 한 사람의 천재나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지난한 노력으로 이뤄진다. 클락슨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진보는 누가 만드는가? 방송에 나오는 논객들인가? 아니면 골목골목을 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활동가들인가? 세련된 보고서를 쓰는 연구자들인가? 아니면 현장에서 땀 흘리며 증거를 모으는 실무자들인가?
토마스 클락슨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명확하다. 역사는 화려한 연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짜 변화는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손가락이 굳도록 편지를 쓰고, 목이 쉬도록 사람들을 설득한 이들이 만든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 "노예제 폐지는 윌버포스 덕분"이라고 말하면, 슬며시 이렇게 덧붙여보자. "아, 그런데 클락슨이라고 아세요?" 역사의 각주에 숨은 이름 하나를 불러내는 것. 그것도 작은 진보가 아닐까.
* 토마스 클락슨(1760–1846)은 1996년 9월 26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50년 만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기념패가 설치됐다. 기념패의 문구는 이렇다. "노예의 벗, 토마스 클락슨." 늦었지만, 그래도 기억됐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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