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그랑프리 중계를 보면 ‘패독 분위기’, ‘패독발 소식’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패독(Paddock)’은 원래 가축, 특히 말을 관리하던 울타리 친 목초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마차 경주와 초기 모터스포츠 시절 레이스 전후 차와 드라이버가 대기하던 공간을 지칭하며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패독은 단순히 팀이 머무는 공간을 뜻하는 용어를 넘어 오늘날 F1의 경쟁 구도를 좌우하는 정치·기술·비즈니스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았다.
1950년대 F1 초창기 패독은 트랙 뒤편에 마련된 단순한 작업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팀 규모 확대와 기술 고도화가 진행되면서 패독은 점차 팀 운영의 핵심 거점으로 발전했고, 현대 F1에서는 경기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전략 공간으로 진화했다.
현재 F1에서 패독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선다. 이곳에는 팀 대표와 드라이버, 엔지니어는 물론 FIA, FOM 관계자, 제조사 경영진, 스폰서, 에이전트, 미디어까지 모인다. 이 때문에 ‘패독 소식’이라는 표현은 공식 발표 이전에 형성되는 내부 기류와 합의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이버 이적설, 규정 변경 논의, 조직 개편과 같은 주요 이슈가 패독을 통해 먼저 흘러나오는 이유다.
패독을 상징하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F1 패독 클럽’이다. 패독 클럽은 일반 VIP석과 다르게 F1의 상업적·전략적 핵심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패독 클럽 이용객은 메인 스트레이트 상공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팀 개러지 투어와 드라이버 및 팀 관계자와의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받는다. 이곳에서는 스폰서십 연장, 신규 파트너십, 기술 협력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주말 기준 1인당 수천 유로에 달하는 이용 요금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 CEO와 국부펀드, 완성차 그룹 수뇌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패독 클럽은 F1이 ‘럭셔리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F1은 엄격한 규정 스포츠지만 해석과 적용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 틈에서 이뤄지는 이른바 ‘패독 정치’는 실제 경쟁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아부다비 그랑프리다. 세이프티카 규정 해석을 둘러싼 판단은 챔피언십 결과를 바꿨고, 이후 FIA 구조 개편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혼다 철수 이후 레드불이 파워 유닛 동결 규정을 관철시키며 레드불 파워트레인을 출범시킨 과정 역시 패독 협상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드라이버 이적, 팀 대표 교체, 제조사 복귀 및 철수, 기술 규정 변화 등 F1의 주요 이슈는 대부분 패독에서 먼저 논의된다. 이후 비공식적으로 미디어에 전달되고, 공식 발표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F1 뉴스에서 ‘패독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현장 관계자들의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의미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패독은 더 이상 ‘트랙 뒤편 공간’이 아니다. F1에서 패독은 정보와 권력, 비즈니스가 교차하는 또 하나의 전장이며 때로는 트랙 위 결과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무대다. F1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이스뿐 아니라 패독에서 벌어지는 흐름을 읽는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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