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 칼럼니스트] 2025년 한국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러닝’으로 뜨거웠다. 주중과 주말,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러닝 인파가 도심을 채웠다. ‘국민 누구나 한 번쯤 뛰어본 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스타들의 참여를 비롯해 기업, 지자체, NGO가 러닝 이벤트를 잇달아 개최했다. 러닝 붐은 탄력적으로 대중 일상에 녹아들었다.
러닝을 삶의 루틴으로 선택한 MZ세대와 도시를 무대로 활동하는 러닝 크루의 확산은 러닝이 생활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건강 문화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의 러닝이 더 나은 문화로 발전되기 위해선 그로 인해 빚어진 여러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스포츠를 대하는 태도를 가다듬어야 할 시점이다.
건강사회로의 기반
러닝 문화의 순기능은 분명하다. 기부 러닝과 환경 캠페인 러닝 등은 ‘내 건강을 위해 뛰는 발걸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식을 대중에게 심어줬다. 개인이 실천하는 운동이 사회적 선행과 자연스럽게 접합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참가자의 대회 참가비용 일부와 후원금은 자선단체에 전달된다. 여러(기후, 아동, 취약계층 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다. 신체적 건강 뿐만 아니라 사회적 건강으로 향하는 밑그림 역할을 했다.
크루 중심의 스포츠 모임 문화는 혼자만의 삶을 사는 오늘날 개인을 공동체로 자연스레 유인한다. 나이와 직업, 성별을 넘어 서로의 건강을 응원하는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가 된다.
인식과 실천의 부조화
러닝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 긍정 인식이 너무나 선명했던 탓일까.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어쩌면 알고 있었으나 과거처럼 잊고자 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랐다. 안전 문제 및 무분별한 공공시설 및 공간 이용의 피로가 점차 누적됐다. 야간에 강변 교량과 도로를 점거하다시피 활주하는 일부 집단 러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보행자ㆍ자전거 도로 가릴 것 없이 무질서로 바뀐 코스 점유는 통행 불편과 소음 피해를 안겼다.
일부 러닝 모임은 안전요원이나 도로 반사 장비 없이 인원을 대거 늘렸다. 무단횡단, 불법 차량 통제, 무분별한 도로 위 휴식 형태 등 ‘사고를 유발하는’ 상황을 반복 연출했다. 이는 러닝 문화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
인증과 인정의 괴리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유행을 일으킨 ‘러닝 인증’은 러너들 간 서로를 독려하는 기록 공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경쟁하듯 번지는 조회수와 팔로워 몰이에 그 취지는 너무나 쉽게 퇴색됐다. 폭우나 폭염을 무시한 채 위험한 러닝을 이어가거나 소통량이 많은 도심 속 차량 사이에서 러닝을 촬영하는 등 ‘위험 소비’ 콘텐츠로 변질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영상 속 인물에 대한 기록·몸매·장비를 비교하는 일부 누리꾼의 왜곡된 댓글 문화는 순수 목적을 지닌 초보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겼다. 부상 위험도가 높은 러닝을 강제하는 과열된 모습까지 나타났다.
일부가 전체를 대변할 순 없다. 하지만 러닝 열풍에 기댄 기업 스폰서와 인증에만 몰두한 러너는 공존의 가치를 외면하고 ‘나 혼자’를 과시하는 도구로 러닝을 삼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상식과 규범의 어깨동무
새해가 밝아오는 지금, 필요한 것은 ‘running’을 ‘learning’로 바꾸려는 용기다. 러닝 속도와 기록이 아니라, 방향을 가다듬고 문제를 개선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공공시설 장소가 함께 이용하는 것이라는 ‘상식’을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양보, 일렬주행, 소음 최소화 같은 사회적 기본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 ‘learning’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안전의식’에 대해 ‘선택’이 아닌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악천후, 악조건 상황에서 러닝을 금하는 기본 규칙이 제시돼야 한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거나 어기는 경우, 러닝 참여 제한이 될 수 있는 정도의 자율적 규제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안전한 러닝’이 ‘기록 러닝’보다 더 가치 있는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혼자만’의 러닝에서 ‘모두’의 러닝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올해 러닝이 남긴 큰 숙제다.
|
지속가능한 관계 만들기
‘러닝 인증’의 기준도 다시 설계해야 한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위험하게’가 아니라, ‘서로 안전하고, 서로 배려하며, 서로 존중하는’ 지속가능한 관계를 만드는 러닝이 주목받아야 한다.
러닝으로 형성된 여러 플랫폼과 커뮤니티는 ‘무모한 도전’ 퀘스트가 아니다. 소음을 줄이고 쓰레기를 되가져오며, 약자를 보호하는 러닝으로 지역민과 함께하는 사회적 독려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는 러닝을 ‘보여주는 개인 퍼포먼스’에서 ‘함께하는 모두의 실천’으로 선회하는 기점이 될 수 있다.
‘생활 스포츠’는 성과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다. 2025년 러닝은 한국 생활체육의 판도를 바꿨다. 동시에 우리 사회와 구성원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물음에 대한 답은 ‘얼마나 빨랐나, 얼마를 뛰었나’가 아니다. 뛰면서 ‘무엇을 배웠나, 누구와 함께, 어떻게 했나’가 답이다. ‘running’을 통해 ‘learning’을 이룰 때 일시적 유행이 아닌 성숙한 시민 스포츠 문화로 나아갈 것이다.
뛰다 보면 넘어질 수 있다. 중요한 건 털고 일어나 다시 뛰는 것이다. 지금 당신처럼.
|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