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비대면 진료의 법적 근거를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23일 공포되면서, 국내 디지털헬스케어 산업이 제도권 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5년 간 시범사업을 마치고 상시 제도화 단계로 전환되는 가운데 제약·병원·플랫폼 기업의 전략 축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양상이다. ‘좋은 약을 만드는 산업’에서 ‘환자의 일상을 관리하는 산업’으로의 이동이 본격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디지털헬스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디지털헬스 시장 규모는 7조7409억원으로 전년 대비 18.7% 성장했다.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와 데이터 분석·정보 제공 서비스가 시장 성장을 주도, 관련 종사자 수는 20% 이상 증가했다. 수출액도 2조5000억원을 넘기며 전년 대비 약 2.7배 확대됐다. 다만, 국민의 83.5%가 디지털헬스 서비스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실제 이용 경험은 36%에 그쳐, 제도화 이후 의료 현장과 소비자 체감 확산이 산업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 같은 전환기에 상징적 사례로 종근당의 행보가 주목된다. 종근당은 최근 AI 수면분석 설루션 기업 ‘에이슬립’과 협력해 스마트폰 기반 수면무호흡증 진단보조 소프트웨어 ‘앱노트랙’ 유통에 나섰다. 별도 장비 없이 소프트웨어만으로 작동하는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것은 종근당이 첫 사례다. 수면무호흡증은 고혈압·당뇨·고지혈증 등 만성질환과의 연관성이 높은 질환으로, 종근당은 이를 만성질환 치료제 포트폴리오와 결합해 시너지를 모색하고 있다.
종근당의 디지털 전략은 외부 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조 현장에서는 이미 AI·빅데이터·자동화를 접목한 공정 혁신을 추진해 왔고, 천안 공장은 타정 공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품질을 예측하는 AI 시스템을 구축, 품질관리 전반을 실시간 데이터로 통합 관리하고 있다. 진단·치료 영역에서 축적한 디지털 역량을 제조·공정에서 검증한 뒤, 이를 다시 대외 사업 모델로 확장하는 게 전사 전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도 변화는 병원과 플랫폼 영역에서도 파급력을 키우는 분위기다. 강북삼성병원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카카오헬스케어는 최근 국내 최초 보건의료 개인정보관리 특수전문기관으로 지정됐다. 의료 마이데이터를 기반으로 정신건강, 만성질환, 약물 관리 서비스를 본격화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비대면 진료와 의료 마이데이터가 결합되면, 개인의 진료 이력·복약 정보·생활 데이터가 하나의 관리 체계로 연결되는 구조가 현실화된다.
제약업계 전반에서도 전략 변화가 뚜렷하게 감지된다. 한독은 불면증 디지털 치료제 ‘슬립큐’를 비대면 진료 환경에 맞춰 처방 인프라를 구축, 앱 기반 치료가 실제 진료 흐름에 편입되는 모델을 선점하고 있다. 또한 SK바이오팜은 AI 기반 뇌전증 발작 감지 설루션을 통해 환자 상태를 원격으로 모니터링하고, 이를 비대면 진료 데이터와 연계하는 전략을 강화 중이다. 치료제 단독 공급을 넘어, 환자 상태를 지속적으로 추적·관리하는 구조로 사업 범위를 확장하는 흐름이다.
플랫폼과 유통 접점을 둘러싼 경쟁도 동시에 가속화되고 있다. GC녹십자는 계열사를 통해 EMR과 진료 예약 플랫폼을 결합한 의료 인프라를 확보했고, 한미약품과 대웅제약은 e-디테일링과 온라인 유통 채널을 중심으로 처방과 공급의 디지털 연결고리를 넓히고 있다. 비대면 진료가 활성화될수록 ‘어떤 약을 만드느냐’보다 ‘환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치료 옵션을 접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제약사 역할도 연구개발과 영업에 국한되지 않고, 진단부터 치료·관리까지 진료 흐름 전반으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정부 정책도 이 흐름에 재정과 제도 측면에서 힘을 싣고 있다. 정부는 2030년 ‘바이오 의약 글로벌 5대 강국’을 목표로 1500억원 규모의 임상 3상 특화 펀드를 조성해, 혁신 신약과 디지털헬스 기반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기업의 후기 임상과 상용화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동시에 ICT 기반 의료시스템의 해외 진출을 전담 지원하는 구조도 마련했다. 해외 인수 병원이나 현지 의료기관을 거점으로 디지털 헬스 서비스와 의료기기를 실증·검증하고, 다인종 임상 데이터를 확보해 미국 FDA 등 해외 인허가와 수출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내수 실증에 머물렀던 디지털 헬스 모델을 해외 병원 기반의 테스트베드로 확장해 수출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제도화가 곧바로 시장 안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대면 진료 확대 과정에서 플랫폼의 역할과 한계를 둘러싼 규제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비만·탈모 등 비급여 영역을 중심으로 과잉 처방 우려도 여전히 변수로 남아 있어서다. 정부가 전자 처방전 보안 기준을 대폭 강화하면서 이를 충족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운영 비용이 의료기관과 제약사, 특히 중소 사업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비대면 진료 환경에서는 환자의 선택권이 구조적으로 확대된다. 대면 진료 중심의 ‘의사-제약사’ 관계를 넘어, 플랫폼 화면과 알고리즘을 통해 치료 옵션이 제시되는 구조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에 제약사의 전략도 의료진 중심 영업에서 벗어나, 환자 인식과 디지털 접점 관리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구조 변화는 비대면 진료의 편의성 확대와 함께, 의료 서비스 전반에서 신뢰와 책임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최경일 보건복지부 의료정보정책과장은 “이번 의료법 개정과 보건의료 데이터 제도 정비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안전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이라며 “책임 있는 데이터 활용과 제도적 관리 아래 산업이 지속 성장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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