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일단의 기자들이 있었다. 권력에 맞서다 강제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소속 기자·PD·아나운서. 그들은 유신 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언론 자유를 향한 외침과 진실의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권력에 맞선 그들에게 돌아온 건 강제 해직의 칼날이었다. 펜은 칼에 꺾였지만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신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투쟁은 한국 언론사에 ‘자유’를 새긴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그러나 승리의 역사가 기록되는 동안, 정작 그 주역들의 삶은 잊혀지고 외면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흑백의 시간’ 속에 남겨졌다. 투데이신문은 기획연재 [시들지 않는 정의]를 통해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과거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언론과 시민사회가 지고 있는 ‘자유의 부채(負債)’를 묻고 지연된 정의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인물의 심연까지 포착해내는 한국 사진계의 거장 서대호 작가와 함께했다.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주름진 얼굴과 한 송이의 꽃은 야만의 시대를 견뎌낸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참회의 ‘헌화’다. 투데이신문이 만난 ‘노병’들의 여전히 날 선 눈빛은 시들지 않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작은 구멍
검은 빙벽 같던 세상에
아주 작은 구멍 하나를 냈다.
거칠게 뻗어 나간 금 하나는
마침내
침묵을 깨는
거대한 노래가 되었다.
밥줄을 틀어쥔
비열한 폭력 앞에서
텅 빈 내장과
비루함으로 가득 찬 주머니만 남았다.
내쳐진 거리의 칼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자유를 향한
뜨거운 몸짓을
결코 멈출 수는 없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어둠 앞에서
손과 발은 다시 묶였다.
펜을 빼앗긴 손으로 삽을 쥐고
갈 곳을 잃은 두 발은
거친 모래바람 부는
사막을 향해야 했다.
오십여 년 전,
작은 구멍의 틈으로
우리는 보았다.
어둠이 끝까지
감추지 못한 것을.
다시 얼어붙으려는 세상에
우리는 아직도 거리를 배회한다.
동아투위 양한수 위원
1967년 양한수 위원은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의 현장을 누볐다. 그러나 그가 몸담았던 시대에는 언론은 존재했지만 자유는 부재했다. 이에 그는 1974년 유신 독재에 맞서 동료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했고 언론이 권력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양심을 선택했다. 그 대가는 1975년 강제해직이었다.
해직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 건설회사 해외 근무 등을 이어가며 긴 시간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이 해직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대가 남긴 폭력이라는 실존적 인식만은 놓지 않았다. 언젠가 이를 기록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책임의식도 변하지 않았다.
1991년 말 문화일보 창간을 계기로 그는 해직 16년 만에 언론계에 복귀했다. 이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유언론 수호 운동을 이어왔고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그 시대의 의미와 과제를 지금의 언어로 전하고 있다.
작품 속에 놓인 ‘열정’을 뜻하는 한 송이 칼라 릴리는 권력의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과 닮아 있다. 해직이라는 상처를 안고서도 언론의 자리를 끝내 떠나지 않았던 신념,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은 자유언론에 대한 열망은 칼라 릴리처럼 묵묵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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