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조 원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2026년도 확장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대부분의 부문이 사상 최대 지출 기록을 경신했다. 연구개발(R&D) 분야가 19.3%라는 폭발적인 증가율을 기록하고 보건·복지·고용 분야가 20.4조 원 늘어나는 등 재정의 시계는 팽창을 향해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팽창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거꾸로 흐른 부문이 있다. 바로 외교·통일 부문이다. 이 부문은 2026년 예산안에서 전년 대비 0.7조 원 감소하며 전체 부문 중 유일한 순감 기록을 남겼다.
0.7조 원의 감소: 국익 중심 외교의 냉혹한 구조조정
외교·통일 부문의 지출 감소는 8.1%라는 정부의 공격적인 확장 재정 기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기술 주도의 초혁신경제와 민생 안정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 재편 결과로 풀이된다. 정부는 이번 예산 편성의 중점 분야로 국익 중심의 외교·안보를 내세웠으나, 실제 숫자는 외형적인 외교 외연 확대보다는 내실 있는 효율화에 방점이 찍혔음을 보여준다.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감소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추진 체계 개편과 통일 부문의 지출 재구조화에서 기인했다. 특히 국제개발협력 종합시행계획에 따른 요구액 변동과 유상·무상 원조 주관기관 간의 조정 과정에서 전략적 선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예산을 깎은 것이 아니라, 효과성이 낮은 국제 지원 사업을 정리하고 실질적인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원을 재배치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반면 안보와 보훈에 대해서는 국회의 최종 합의를 통해 오히려 힘이 실렸다. 여야는 국회 본회의 처리 과정에서 보훈유공자 참전명예수당을 추가 반영하고, 국방 부문에서도 복무 여건 개선을 위한 예산을 증액했다. 이는 대외적인 '원조' 예산은 조이되, 대내적인 '예우'와 '방위력' 예산은 늘리는 실리적 안보관이 반영된 결과다.
안보의 내실화: 정찰위성부터 병사 처우까지
외교 부문의 예산이 줄어든 것과 달리, 방위력 강화와 군 복무 여건 개선에는 상당한 재원이 신규 투입되었다. 기획재정부의 국회 확정 예산 자료에 따르면 정찰위성 임무 수행을 위한 운용센터 조기 구축에 106억 원이 추가되었고, 해병대 케이-2(K-2) 전차 신규 도입 착수 및 공중급유기 1대 추가 도입을 위해 310억 원의 예산이 증액 반영되었다.
군 내부의 사기 진작을 위한 미시적인 지출 조정도 눈에 띈다. 휴일 당직 근무비를 일반 공무원 수준으로 상향(6만 원에서 10만 원으로)하기 위해 55억 원이 추가되었으며, 장기 근속자 대상 격년 주기 건강검진비 지원에도 35억 원이 할당되었다. 이는 거시적인 외교 지출을 줄여 확보한 재원을 군 핵심 전력 자산 확보와 현장 장병들의 실질적인 복지로 돌리는 일종의 '안보 다이어트' 전략이다.
국회 예산 심의에 참여했던 조국혁신당 김재원 위원은 토론회에서 "2026년도 예산이 과거의 긴축과 선택적 재정으로 인한 균열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외국민에 대한 주기적 관리 체계 구축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외교 부문의 전체 파이는 줄어들더라도, 재외국민 보호와 같은 실질적인 서비스 품질은 높여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문과 일맥상통한다.
민생을 위한 외교 예산의 희생
이번 예산안의 최종 합의 과정에서 외교·통일 부문의 감소는 지역사랑상품권과 국민성장펀드 등 이른바 '민생 예산'을 사수하기 위한 야당과, 재정 건전성 수치를 관리하려는 여당 사이의 절충점이기도 했다. 여야는 정부안 수준인 728조 원을 유지하면서도 4.3조 원의 감액과 증액을 주고받았는데 ,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반발이 적은 외교 관련 항목들이 재원 확보의 창구 역할을 한 측면이 크다.
실제로 국회는 외교 예산을 효율화하는 대신 국가장학금과 같은 청년 지원 예산과 도시가스 공급 배관 설치 지원 등 국민 생활 밀접 사업을 증액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재정의 마중물 역할이 과도하게 축소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중장기적인 외교 역량 강화보다는 단기적인 민생 지원에 무게중심이 쏠렸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외교·통일 예산 0.7조 원의 감소는 단순한 숫자의 하락이 아니다. 728조 원이라는 역대 최대의 돈 잔치 속에서 외교 부문만 소외된 것은,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한국 외교 전략의 중대한 변곡점을 시사한다. 국익과 민생이라는 명분 아래 단행된 이 '전략적 축소'가 한국의 대외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지, 아니면 비효율적인 원조 사업을 정리한 내실 있는 외교의 시작이 될지는 2026년 한 해 동안 펼쳐질 국제 정세의 파고 속에서 증명될 것이다. 외교 예산을 깎아 메운 참전 수당과 장학금이 국민의 삶을 얼마나 두텁게 할지는 몰라도,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목소리를 지탱할 재정적 기초가 얇아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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