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성기노 기자】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를 뒤집어쓴 고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사건의 재심이 24일 처음 열렸다. ‘유신 말기’ 비상계엄 아래 군사법원이 내린 판결이 40여년 만에 위헌·위법 여부를 다시 검증받게 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8부(재판장 김성수)는 이날 김 전 실장의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미수 혐의 재심 1차 공판을 진행했다. 재심 청구인 자격으로 출석한 아들 김모씨는 “민간인 신분이었음에도 군 수사기관 수사와 군사법원 재판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고문·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해 왔다.
변호인단은 “주된 쟁점은 비상계엄의 위헌성”이라며 “계엄 포고령에 근거한 합동수사본부·군사법경찰의 조사와 기소가 무효라면 그 절차에 기초한 판결 역시 위법”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도 당시 항소심에 해당하는 육군 고등군법회의 판결을 재심 대상 판결로 정리하고 계엄의 효력과 당시 사실관계를 함께 따져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전 실장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할 때 만찬 자리에 동석했다. 사건 직후 계엄사령부 산하 합동수사본부가 수사·기소를 맡았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본부장을 맡으면서 신군부가 권력 장악 명분을 쌓기 위해 ‘내란 공모’ 프레임을 밀어붙였다는 평가가 이어져 왔다.
김 전 실장은 합동수사본부의 조사 뒤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미수 공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계엄사령관의 감형으로 무기징역으로 형이 바뀌었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1988년 특별사면·복권됐지만 ‘박정희 시해 공모자’라는 낙인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10·26 사건 재판은 모두 계엄 하 군사법원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사건 발생 18일 만에 김재규·김계원 등 8명이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1979년 12월 첫 공판 이후 이듬해 1월 고등군법회의에서까지 사형·중형 선고가 이어졌다.
이후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199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올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 개시가 결정되는 등 10·26 관련 군사재판 전체를 다시 들여다보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김 전 실장 재심은 이런 역사적 재평가의 연장선에서 유신 말기 계엄권력과 군사법체계의 한계를 정면으로 겨누는 사건이 됐다.
김 전 실장 재심 다음 공판은 내년 2월 13일 오후 5시에 열릴 예정이다.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이재권)에서 이미 증인신문을 마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재심 사건도 조만간 변론을 종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두 재심 결과에 따라 10·26을 ‘내란’으로 규정했던 당시 판결 구조가 부분적으로 무너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정희 정권 말기 비상계엄과 신군부 권력 장악 과정, 그리고 그 한복판에 있었던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역할이 법정 기록을 통해 다시 쓰이느냐가 이번 재심의 관전 포인트다.
사실 김 전 실장은 10·26의 직접적 실행자도, 권력 장악을 주도한 핵심 인물도 아니었다.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사이에서 벌어진 파국적 충돌을 막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존재했을 뿐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오랫동안 방관자와 공모자의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재심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유신 말기 계엄권력이 개인의 행위를 어떻게 정치적 프레임으로 재단했고, 군사법원이 전두환의 서슬퍼런 위세에 눌려 어떻게 ‘내란’이라는 일방적인 서사로 봉인했는지를 되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에 대한 재심은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10·26 이후 한국 사회가 너무 쉽게 덮어두었던 권력과 책임, 그리고 침묵과 방관의 사슬을 다시 법정 위에 올려 끊어낸다는 점에서 역사적 재평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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