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연말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본다. 잘 해낸 일과 아쉬운 순간을 함께 꺼내어 놓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조심스레 정리한다. 더 갤러리 호수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그런 연말의 감각을 ‘전시’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자리였다.
제목처럼 이 전시는 단순한 작품 나열이 아니라 한 해 동안의 작업과 고민, 그리고 시간의 흔적을 정리해 보여주는 하나의 기록에 가까웠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결과물’보다 ‘과정’에 대한 태도였다. 완성된 작품이 중심에 놓여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환경과 시간 속에서 태어났는지가 함께 드러나 있었다.
작업실을 옮겨온 듯한 공간 구성은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위치를 조금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보통 작품 앞에서 평가자나 감상자의 자리에 서지만, 이 전시에서는 어느새 작가의 방 켠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은 이동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 작품을 ‘보는 것’에서 ‘이해하려는 것’으로, 더 나아가 ‘공감하는 것’으로 시선을 옮기게 한다.
청년작가들의 ‘결산전’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한 해의 작업을 정산할 수 있을까. 판매 성과나 전시 횟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실패한 시도, 방향을 다시 잡기까지의 망설임, 끝내 전시장에 오르지 못한 수많은 드로잉과 메모들. 이번 전시는 그런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도 일부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성취의 나열이라기보다 ‘지금 이 위치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관람객 참여 공간과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 또한 인상 깊었다. 이는 전시를 일회적인 감상이 아닌, 관계 맺기의 장으로 확장시킨다. 작가와 관람객, 작품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 예술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언어로 남지 않고, 지역과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공공 미술 공간이 가져야 할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 전시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나의 한 해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작업을 하다 보면 늘 다음을 향해 달리기 바쁘다. 다음 전시, 다음 수업, 다음 프로젝트. 하지만 이렇게 한 해를 정리해 보여주는 형식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볼 용기를 요구한다. 작업의 방향은 여전히 유효한지, 내가 붙들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품고 갈 것인지 말이다.
이번 전시는 거창한 선언을 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예술가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며, 그 굴곡 자체가 작업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나누는 방식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시장을 나서며 나 역시 나만의 ‘연말정산’을 마음속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그 뒤에 쌓여 있는 수많은 시도와 망설임까지도 포함한 정산을.
어쩌면 이 전시가 가장 잘 보여준 것은 ‘계속해 나간다는 것’의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거창하지 않아도, 느리더라도, 각자의 속도로 작업을 이어가는 일. 그 꾸준함이 모여 한 해가 되고, 전시가 된다. 그런 생각을 안고 전시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가볍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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