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은 통화의 가격 상승이 아니라 통화의 연결성이 붕괴된 결과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23일 서울 외환시장 종가 기준 1480원을 넘어섰고, 원·파운드는 2000원을 돌파했다. 같은 시점, 원·유로 역시 동반 상승했다. 통화정책, 재정 상태, 성장률, 금융시장 구조가 모두 다른 세 통화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기존 환율 설명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금리, 물가, 성장, 무역, 심리 가운데 어느 변수도 이 동시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통화 간 상대가격의 변동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시스템에서 통화가 연결되는 위치가 재배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환율은 더 이상 통화의 가격을 표시하지 않는다. 환율은 통화가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의 어느 층위에 연결돼 있는지를 숫자로 드러낸 결과다.
통화를 하나의 자산으로 취급하는 순간 분석은 실패한다. 통화는 가격만을 지닌 자산이 아니라, 결제 수단·가치 저장·담보·만기 연결 매개라는 네 가지 기능이 결합된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이 네 기능은 항상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 현대 금융에서 지배적인 기능은 결제나 가치 저장이 아니다. 담보로서의 인정 여부와 단기자금시장에서의 만기 연결 능력이다. 결제 수단이라는 요건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담보로 인정되지 않거나, 단기자금시장에서 재조달이 불가능한 통화는 가격이 아니라 위치로 평가된다. 달러·유로·파운드는 이 네 기능이 모두 활발히 작동하는 통화다. 글로벌 레포 시장, 파생상품 증거금 체계, 결제·청산 인프라에서 서로 대체 가능한 담보 통화로 기능한다. 반면 원화는 이 구조 안에 완전히 편입돼 있지 않다. 이 기능 격차가 그대로 숫자로 환산된 것이 지금의 환율이다.
금리는 더 이상 환율을 결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금리는 환율 결정 체계에서 중심 변수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금리는 통화의 시간 가격에 불과하다. 지금 환율을 움직이는 것은 이자율이 아니라 해당 통화가 담보로 인정되는 범위와 깊이다. 현대 금융시스템에서 자금은 투자 수익률보다 재조달 가능성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얼마나 오래 보유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빌릴 수 있는가가 핵심이 됐다.
이 과정에서 선택되는 통화는 고금리 통화가 아니다. 헤어컷(담보가치 할인율)이 낮은 통화다. 헤어컷은 시장이 특정 통화에 부여한 신뢰를 압축한 수치다. 달러·유로·파운드는 위기 국면에서도 이 헤어컷이 유지된다. 반면 원화는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 담보 인정 폭이 빠르게 줄어든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원화는 매도되고, 핵심 통화는 동시에 강세를 보인다. 지금의 환율은 금리 차이가 아니라, 통화별 헤어컷 격차가 시장에서 가격으로 전환된 결과다.
이번 고환율을 단순한 원화 약세로 해석하는 순간 판단은 빗나간다. 원화의 실물 펀더멘털은 단기간에 급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환율이 아니라 원화가 더 이상 글로벌 금융 조달시장의 필수 통과 지점, 즉 ‘시장 통화’로 기능하지 않게 됐다는 데 있다. 한국 경제의 좌표가 구조적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무역 흑자를 축으로 달러가 유입되던 경제에서, 자본 이동을 매개로 달러가 순유출되는 경제로 전환됐다. 실물 결제 통화에서 투자 중개 통화로의 성격 변화도 동시에 진행됐다. 이 구조 안에서 환율은 더 이상 무역의 함수가 아니다. 환율은 자본 이동이 끝난 뒤 남는 잔차에 가깝다. 문제는 정책과 시장 분석이 여전히 무역·금리·성장률이라는 과거의 설명 변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잔차를 가격처럼 해석하는 순간, 설명은 어긋난다. 반복적인 오독이 발생하는 이유다.
고환율의 충격은 선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정 수준을 넘는 순간, 작동 방식 자체가 바뀐다. 환율은 수출 가격을 직접 바꾸지 않는다. 무역금융의 조건을 바꾼다. △결제통화 △선수금 비율 △신용장 조건 △보험료 △운송비 △파생상품 비용이 동시에 재산정된다. 이 과정에서 환헤지 수단이 없거나 내부적으로 달러를 창출하지 못하는 주체부터 탈락한다. 산업 역시 환율 민감도로 갈리지 않는다. 달러 비용이 구조적으로 내재돼 있는지 여부에 따라 갈린다. 고환율은 산업을 키우지 않는다. 산업을 분리한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위험은 총량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만기와 타이밍에서 발생한다. 외화차입의 롤오버 시점에 필요한 달러가 늘어나고, 동시에 담보 가치 하락에 따른 추가 담보 요구가 발생하며, 파생상품 계약에서는 증거금이 즉시 현금으로 요구된다.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순간, 기업은 이익의 유무와 관계없이 단기간에 대규모 외화 현금 유출을 맞게 된다. 이때 위기는 손익계산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금흐름표상 영업·재무·투자 구분을 따질 시간도 없이, 실제 현금 잔고가 특정 시점에 바닥나는 형태로 발생한다. 장부상 흑자와 무관하게 시스템이 멈추는 이유다.
원·달러 1480원은 비싸고 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통화가 다른 규칙으로 평가되기 시작하는 임계값이다. 이 선을 넘으면 △정책 효과도 △기업 행태도 △자본 흐름도 달라진다. 금리를 내려도 환율은 내려가지 않는다. 외환보유액을 언급해도 시장은 반응하지 않는다. 환율은 이미 통화정책의 영역을 벗어났다.
지금의 고환율은 정책 실패가 아니다. 통화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결과다. 환율은 더 이상 정책이 통제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환율은 금융시스템이 통화에 매긴 기능 점수의 출력값이다. △원·달러 1480원 △원·파운드 2000원은 숫자가 아니다. 통화 질서가 이동했음을 알리는 좌표다. 이 좌표를 읽지 못하면 다음 국면에서도 또 같은 오독이 반복될 것이다. 시장은 이미 다음 체계로 넘어갔다. 설명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