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이끌 것이다"
[AP신문 = 배두열 기자]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수년째 반복해 온 이 말은 한국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2025년 12월 현재, 그 약속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교묘한 '언어의 유희'가 발견된다. 자녀들을 남이 아닌, 그룹의 자본으로 육성된 '전문경영인'으로 만들어 승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오너 2세의 전문경영인화(化)' 작업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24일 투자(IB)업계에 따르면, 박 회장의 장녀 박하민 씨는 지난 9월 미국 벤처캐피탈(VC) 넥서스베이캐피탈(NexusBay Capital)의 컨설팅 어드바이저로 합류했다.
GFT벤처스(Global Frontier Technology Ventures) 퇴사 직후 새로운 둥지를 튼 것으로, 다만 프리랜서 형식으로 컨설팅 어드바이저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새로운 VC 합류나 컨설팅 어드바이저 확대 등을 두고 향후 거취 방안을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 '아빠 찬스'로 쌓은 커리어…'인큐베이팅 승계' 논란
업계에서는 박하민 씨의 행보를 '독자 생존'이라기보다 '인큐베이팅'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녀가 창립 멤버이자 파트너로 활동했던 GFT벤처스의 성장 과정을 보면 이는 확신으로 바뀐다.
1989년생인 박하민 씨는 미국 코넬대 역사학과, 스탠퍼드대 MBA(경영대학원 석사) 졸업했다. 맥킨지앤컴퍼니·CBRE를 거쳐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 법인·블랙스톤에서 금융 투자 경력을 쌓았다.
이후 미국 실리콘밸리로 넘어가 벤처투자자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2021년 4월 GFT벤처스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는데, 박하민 씨가 몸담은 4년 5개월간 GTF벤처스는 미래에셋금융그룹과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해왔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경우 GFT벤처스가 2023년 결성한 1억4000만달러 규모의 첫 펀드에 핵심 출자자(LP)로 참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셋 계열사들은 GFT벤처스가 발굴한 스타트업(마스오토, 피크먼트 등)에 후속 투자를 단행하며 트랙 레코드(실적) 관리를 전방위로 지원했다.
즉, 박하민 씨가 실리콘밸리에서 쌓았다는 '글로벌 VC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냉정하게 말해 아버지 회사의 막대한 자금력(AUM)이 깔아준 '꽃길' 위에서 획득했다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IB 업계 관계자는 "맨땅에 헤딩하며 딜(Deal)을 따내야 하는 일반적인 벤처캐피탈리스트와 달리, 그룹의 자금이 마중물이 되어준 펀드 운용 경험을 온전한 개인의 능력으로 포장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이는 전형적인 '경력 만들어주기' 식 지원"이라고 꼬집었다.
여기서 박현주 회장이 강조한 '전문경영인 체제'의 맹점이 드러난다. 대중이 '승계 포기'로 오독(誤讀)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상황을 복기해보자. 장녀 박하민 씨는 VC 컨설팅 어드바이저로서, 장남 박준범 씨는 미래에셋벤처투자 심사역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들이 수년간의 실무 경험을 앞세워 "이제 글로벌 감각을 갖춘 검증된 전문가가 됐다"며 그룹의 C레벨(임원)로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박 회장은 "핏줄이라서 시키는 게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 '전문경영인'이라서 맡기는 것"이라는 완벽한 논리를 내세울 수 있다.
즉, 세습을 '능력주의'로 포장하는 고도의 꼼수가 가능한 구조다. 전문경영인이 꼭 '남'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논리다.
■ '지분 승계' 작업은 착착…증여·상속 재원 마련 시나리오 주목
더 본질적인 문제는 '경영권'이라는 단어에 가려진 '소유권' 승계와 이를 뒷받침할 자금 마련 시나리오다.
미래에셋그룹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회사는 상장사인 미래에셋증권이 아니라 비상장사인 미래에셋컨설팅이다. '박현주 일가 → 미래에셋컨설팅 → 미래에셋캐피탈 → 미래에셋증권'으로 이어지는 옥상옥(屋上屋) 구조는 미래에셋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박하민 씨를 비롯한 세 자녀는 이 미래에셋컨설팅 지분을 각각 8.19%씩 보유하고 있다. 박 회장(48.63%)과 배우자(10.24%)의 지분을 합치면 오너 일가의 지분율은 91.86%에 달한다.
주목할 점은 최근 자회사 지분 매입 등으로 박현주 회장을 비롯한 특수관계인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주주환원 정책이 강화될수록, 지배구조 상단에 위치한 오너 일가의 효용이 극대화되는 구조를 만든다.
특히 시장에서는 '미래에셋생명 자진 상폐 시나리오'를 유력한 승계 재원 마련책으로 꼽는다. IB 업계 관계자는 "미래에셋생명을 자진 상장 폐지한 후 발생하는 염가매수차익을 모회사인 미래에셋증권이 인식하게 되면, 증권의 이익잉여금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며, "이는 고스란히 상위 지배회사인 미래에셋캐피탈과 컨설팅으로 흘러 들어가 오너 일가의 증여·상속 배당 재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기본적인 지분'은 확보했고, 추가로 물려받을 '세금 낼 돈'까지 계열사 구조조정과 배당 시스템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셈이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미래에셋의 행보를 두고 '승계의 진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과거 재벌들처럼 입사하자마자 임원을 다는 '무식한'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대신 외부에서 '세련된' 커리어를 쌓게 하고, 비상장 지주사 지분은 조용히 증여해 실질적 소유권을 넘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IB 업계 관계자는 "박 회장의 '2세 경영 불가' 선언은 역설적으로 '준비된 2세 경영'을 위한 알리바이였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자본(Equity)과 이력서(Career)가 이미 완벽하게 세팅된 자녀들이 언젠가 '검증된 전문경영인'이라는 명분으로 복귀할 때, 시장이 이를 '승계'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씁쓸함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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