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 제도 개편을 둘러싸고 제약·바이오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제네릭(복제약)과 특허 만료 의약품의 약가를 대폭 낮추는 방안이 현실화될 경우, 산업 전반에 걸쳐 수조 원대의 손실과 의약품 공급 불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잇따르고 있다.
제약·바이오 관련 주요 단체들로 구성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기구는 22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검토 중인 약가 인하 정책의 시행을 유예하고 제도 전반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현행 약가 정책이 단기적인 재정 절감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산업 구조와 중장기적 보건의료 안정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논란의 핵심은 복제약과 특허 만료 의약품의 약가 산정 기준이다. 정부는 해당 의약품의 보험 약가를 오리지널 의약품 대비 현행 53% 수준에서 40%대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절차를 거쳐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적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약가 체계를 합리화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업계는 이 같은 조정이 제약사의 수익 기반을 급격히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대책기구 측은 개편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연간 최대 3조6000억 원 규모의 매출 감소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연구개발 투자 축소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특히 중소 제약사와 제네릭 의약품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타격이 클 것이라는 분석이다.
의약품 공급망 안정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약가 인하 압박이 커질 경우, 국내 생산의 채산성이 떨어져 수입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고, 일부 품목은 공급 중단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는 해외 사례를 들어 약가 인하가 반복되면 특정 의약품의 품절과 시장 이탈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과거 수차례 약가 인하 정책이 시행됐지만, 그 효과와 부작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드물었다고 지적한다. 실거래가 제도 도입 이후 반복된 가격 조정이 실제로 국민 의료비 부담을 얼마나 줄였는지, 산업 경쟁력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약가 개편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업계는 재정 절감과 산업 육성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의약품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공공재적 성격이 강한 만큼, 가격 정책이 공급 안정성과 품질 관리, 신약 개발 여력까지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논리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신중론이 나온다. 약가 인하 자체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급격한 조정은 시장 충격을 키울 수 있는 만큼 단계적 적용이나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특히 국내 제약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시점에서 정책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장기 전략 수립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는 정부에 일방적인 정책 추진 대신, 충분한 협의와 영향 분석을 거친 제도 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약가 정책이 국민 보건, 건강보험 재정, 산업 성장이라는 세 가지 축의 균형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향후 정부가 업계와 어떤 방식으로 접점을 찾을지, 약가 제도 개편 논의의 향방에 관심이 쏠린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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