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강지혜 박효령 권신영 전세라 기자】강남의 한 스튜디오, 조명 아래 마주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원로들의 표정에는 50여년 전의 결기가 여전히 서려 있었다. 반세기가 흐른 세월 속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또렷했다. 이들에게 이번 촬영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인 진정한 용서와 명예 회복을 다시금 공론화하는 자리였다.
이 투쟁의 중심에는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이 있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주역이었던 그는 유신 권력의 언론 통제에 맞서다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됐다. 이후 그는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될 위기에 처했을 때 수감 중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 가교 역할을 하며 민주화의 도화선을 당겼다. 3선 국회의원과 정당 지도부를 지낸 뒤에도 그는 늘 ‘해직 언론인’이라는 본령을 잊지 않고 자유언론실천재단 등을 통해 언론 자유의 역사화를 이끌어왔다.
‘시들지 않는 정의’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기획 촬영에서 이 위원장은 50여 년 전으로 돌아가 그날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이후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촬영에서 이 위원장을 상징하는 꽃으로 ‘보라색 카네이션’을 선정했다. 기품과 자유, 그리고 성취를 상징하는 이 꽃은 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언론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했던 그의 여정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담긴 그의 단단한 눈빛은 당시의 선택과 책임이 오늘날 우리 언론의 기준을 어떻게 세웠는지를 묻는 소리 없는 증언이었다.
이 위원장은 반세기를 넘긴 투쟁의 시간뿐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가족들을 떠올리며 누구보다 진지하게 촬영에 임했다. 거친 세월을 버텨온 그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라며 겸허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 기저에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묵직한 용기가 깔려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상처가 아문다고 말하지만 언론 자유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아직 제대로 된 사죄도, 마땅한 명예 회복도 해주지 못했다. 이번 기획은 그들에게 구해야 할 ‘늦은 용서’의 의미를 되묻는다. 여전히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아문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언론 자유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던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아직 제대로 된 사죄도, 마땅한 명예 회복도 건네지 못했다. 이번 기획은 그들에게 우리가 여전히 미뤄두고 있는 ‘늦은 용서’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투데이신문> 은 동아투위 이부영 위원장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진정한 용서에 대한 그의 답을 기록했다. 투데이신문>
고통은 잊히지 않는다
Q. 이번 촬영은 ‘시들지 않는 정의’를 주제로 50여년 전 그날의 기억과 감정을 기록하고 오늘날 우리가 위원장님에게 뒤늦은 용서를 구하는 콘셉트로 진행됐다. 해묵은 감정을 다시 꺼내 카메라 앞에 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촬영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치 배우가 된 듯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끌어올리다 보니 겹겹이 쌓여 있던 자연스럽게 예전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사람이란 게 그렇잖나. 결국 가장 가슴에 남는 애절한 기억이 먼저 찾아오기 마련이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갓난아이 둘을 데리고 면회 오던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나 없이 밖에서 아이들을 챙기며 힘들게 살림을 꾸려나갔을 아내를 생각하면, 나보다 우리 가족이 더 고생했을 것이다. 아무리 큰 사건을 겪어도 결국 가장 마음을 울리는 건 가족에 대한 기억이다.
Q. 서대호 작가와 함께 진행한 사진 촬영 작업에 대한 느낌을 말해준다면.
서 작가와 함께한 촬영은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다. 나의 집중력을 끝까지 잘 이끌어준 점이 고맙다. 기자 생활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사람의 진실한 모습을 포착하려면 촬영 중에도 알람처럼 끊임없이 자극을 주며 신경을 써야 하는데 서 작가가 그 역할을 아주 훌륭히 해냈다. 무엇보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남길 기회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Q. 이번 기획을 통해 뒤늦게 동아투위·조선투위 분들께 용서를 구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자 했다. 가해 주체들에 의한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도 부재한 상황에서 위원장님이 내린 ‘용서’란 무엇인지.
현장에서 자유 언론을 위해 투쟁하던 시절로부터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여러 감정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결국 역사를 이기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아일보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는 분노와 증오를 넘어 우리가 죽음의 문턱까지 온 시점이니 만큼, 해묵은 감정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지난해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행사를 가졌고, 올해 3월 17일에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제 동아일보사 앞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50년이 지나도록 사과는커녕 부당한 해직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더 이상 사죄를 요구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전히 사과 않는 동아일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다. 이제 역사가 심판하도록 시간에 맡기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는 역사를 마주하며 ‘용서’라기보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동아투위는 물론 과거 탄압자였던 동아일보, 박정희 전 대통령, 중앙정보부까지 모든 것은 역사에 기록되고 그 안에서 판정받을 것이다.
투쟁으로 수호한 언론의 가치
Q. 책 <우리는 아직 거리에> 를 보면 위원님의 과거 흑백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흑백으로 진행된 이번 촬영에 임하면서 떠오르는 과거 사진 혹은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지.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면 여러 장면이 스치지만 특히 백지광고 사태 당시의 기억이 강렬하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는 뉴스 제작 전 검열을 일삼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신문사에 상주하며 제작에 직접 개입했고, 여러 압력을 행사해 광고가 끊기면서 신문 지면이 백지로 나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언론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빈 공란을 채워준 것은 시민들이었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격려광고를 보내 지면을 메워주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광경이었다. 이번 촬영에 임하며, 당시 국민적 성원의 상징이었던 수많은 흑백 격려광고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Q. 이번 촬영을 빌려 동아일보 기자였던 과거 자신에게 한마디를 건넨다면.
그 시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족이다. 특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정말 크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부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일 때문이라 해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족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투쟁의 연속이었고 물리적 여유조차 없던 나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뒤로 미뤄두었던 선택이 옳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여전히 가족들에게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흐르는 역사, 뒤늦은 용서
Q. 이 여정이 위원님께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라나.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에는 늘 외로웠다.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고, 감시 속에 살다 보니 ‘이 싸움을 우리만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결국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역사가 흘러가면서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잘못 살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촬영 또한 내게는 그런 의미였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누군가 다시 바라봐 주고, 정당하게 평가하며, 함께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다.
더불어 이렇게 언론인 후배들이 친구처럼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예전의 우리는 ‘빨갱이’로 몰리고 사실이 왜곡돼도 그 억울함을 제대로 써주는 곳조차 없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이렇게 언론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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