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 시기별 의미를 담아 이 글을 써 내려가고자 한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아버지께서 즐겨 들으시던 트롯(도롯도)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후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음악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청소년기에는 록밴드 활동으로 음악적 열정을 키워 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고, 대학에서는 순수음악(클래식) 중심의 작곡과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대중음악 관련 전문 학과가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대중음악의 가치는 대학의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이 아직 다양성과 대중성 면에서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한국이 군사정권 아래 엄격한 검열과 통제 속에서 발전했고, 음악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수의 음반을 출시할 때는 건전가요, 국가 정책 홍보 가요 같은 음악을 1곡씩 같이 실어야 출시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규제와 규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음악의 표현과 내용이 제한적이었고, 대중음악 장르도 제한적이었다.
이 시기 나는 미국 팝 음악, 특히 디스코와 록 등 서양 음악을 감상하고 따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다. 당시 미국 팝과 한국 대중음악 간에는 엄청난 격차와 차별이 분명 존재했다고 그 시기에 항상 느껴 왔다.
그 시기의 음악적 특징은 잔잔한 감성, 슬픔과 희망이 뒤섞인 가사, 그리고 제한된 악기 편성에 기반한 단순한 멜로디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또, 음악은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일상적 감정과 민족적 정서 표현에 치중했으며, 대중문화 사업도 산업화 이전이라 아직 미미한 수준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대중음악은 급격한 변화와 성장을 겪기 시작한다. 미디어와 기술의 발전, 인터넷의 도입, 그리고 해외 음악의 유입은 한국 음악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예전에는 격차와 차별의 벽이 높았지만, 지금은 세계와 교류하며 한류라는 문화적 흐름의 중심에 섰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른 순간, 나는 벅찬 감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빌보드 차트에 한국 가수가 1위에 오른 것을 보게 될 줄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고, 한국 음악이 세계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됐다는 상징이었다.
현재 나는 대학에서 뮤직 비즈니스와 음반 제작, 기획을 강의하며 음악 산업의 변화와 그 의미를 목격하고 있다. 개인적인 음악 경험과 시대적 배경은 내게 더 깊은 이해를 안겨주었고, 그 이야기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며 간절하다.
이 연재는 우리 음악이 겪어온 과거의 고난과 현재의 성공,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아우르며 대중에게 그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고자 하는 작은 계기이다. 우리의 음악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한 시대의 감정과 저항, 희망의 기록이며,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모두 한국 대중음악이 가진 깊은 가치와 힘을 다시 한번 느끼기를 바라며, 그 귀중한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국민이 모두 함께 기억하고 의미 있게 새겨나가기를 음악인으로서 간절히 소망한다.
여성경제신문 김성만 음악프로듀서 · 공연기획자 musicma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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