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존재했지만,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튀니지에서 법률구조와 통합사회서비스를 교차 분석한 유엔개발계획(UNDP)의 실증조사는 ‘사법 접근권’이 제도 설계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18일 UNDP 조사에 따르면 튀니지 ‘Amen Social’ 수혜 가구의 24%가 법적 문제를 경험했지만, 실제 무료 법률구조를 이용한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법적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는 42.3%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는 무료 법률구조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비율은 15.5%에 그쳤다. 절차에 대한 인식과 권리에 대한 인식 사이에는 뚜렷한 단절이 존재했다.
국가 법률 서비스의 붕괴는 단순한 인식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구 10만 명당 사회복지사 수는 6년 만에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남아 있는 사회복지사들도 현장 지원보다 행정 업무에 묶여 있다. 사회복지사의 전체 업무 가운데 75%가 행정 처리에 투입되고 있고, 불필요하게 비대해진 행정 절차 속에서, 정작 실질적인 법률·복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인구는 제도 밖에 방치됐다.
법률구조는 사법부 제도로 분리돼 있었고, 사회서비스와의 연결은 구조적으로 차단돼 있었다. 법적 위기를 겪는 가구일수록 복지 서비스 이용 가능성은 높았지만, 정작 법률구조로까지 이어지는 경로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법은 제도 안에 있었고, 시민은 그 밖에 있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한국으로 옮겨진다. 형식적으로 보면 한국은 튀니지와 다르다. 대한법률구조공단, 국선변호 제도, 지방자치단체 무료 법률상담, 법률홈닥터 제도까지 제도 목록은 촘촘하다. 법률구조는 헌법상 재판청구권의 하위 제도로 정착돼 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법이 없는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구조를 들여다보면 닮은 지점이 드러난다. 한국의 법률구조 역시 사법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복지 행정, 의료·주거·고용 서비스와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시스템은 거의 없다. 사회복지사가 법률 문제를 조기에 발견해 자동으로 법률 지원으로 연결하는 구조는 제도화돼 있지 않다. 법률 문제는 ‘사건’이 된 뒤에야 사법 시스템에 올라온다.
국제 기준은 이 지점을 이미 넘어섰다. OECD와 UNDP가 공유하는 최근의 사법 접근권 개념은 이를 ‘권리 보장 제도’가 아니라 복지 인프라로 규정한다. 의료 접근권, 교육 접근권과 같은 층위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법률 문제는 빈곤, 질병, 장애, 가정 해체와 동시에 발생하며, 분절된 제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전제다.
튀니지 조사에서는 이 기준이 숫자로 확인됐다. 법적 문제를 겪는 가구는 통합사회서비스 이용 가능성이 2.3배 높았고, 가구 내 중증 질병이나 장애가 있을수록 그 확률은 더 높아졌다. 법률 문제는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복합 취약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제도는 이를 분절해 처리했다. 결과는 ‘법은 있으나, 길은 없는’ 상태였다.
UNDP가 제시한 해법은 명확했다. 법률구조의 디지털화, 사회복지사의 기초 법률 교육, 사법·복지 정보 시스템의 상호 연계, 변호사 보상 구조의 현실화. 핵심은 예산 증액이 아니라 연결 설계였다. 법을 복지 인프라로 재배치하지 않으면 접근 가능한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튀니지의 사례는 개발도상국의 실패담이 아니다. 사법 접근권을 여전히 ‘법률 전문가의 영역’으로만 다루는 국가라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구조적 경고다. 한국 역시 제도 보유국이라는 안도감에 머문다면, 법은 존재하지만 시민에게 닿지 않는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 정의는 선언이 아니라 인프라다. 그리고 인프라는 연결에서 완성된다.
UNDP 튀니지 통합사회서비스(ISS) 연구에 참여한 관계자는 “법률구조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서비스와 구조적으로 분리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법률 지원을 사법부 제도의 부속물이 아니라 복지·보건·장애 서비스와 연결된 사회 인프라로 재설계하지 않으면 접근 가능한 정의는 성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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