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안에 끝내려던 프로젝트를 겨우 마무리했고, 아이들은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다. 2025년을 돌아보며 한 해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좋았던 점과 부족했던 점, 내년에는 어떤 일들을 하고 싶고, 고쳐나가고 싶은지 조금씩 마음속으로 정리해 본다.
마음을 쓰고 공을 들였는데도 안 되는 날도 있었고, 힘들이지 않았는데 술술 풀리는 날도 있었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별일 아닌데도 가족과 낄낄거리며 잠든 저녁도 있었고, 모든 게 다 바닥으로 내려앉아 점이 되어 사라지고 싶은 새벽도 있었다.
새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었는데 상상의 단계에서 끝난 적도 많았고, 신경을 거의 쓰지 못한 베란다의 고사리는 어느새 잎이 무성하게 잘 자라주기도 했다. 일주일 치 식단을 짜서 거의 그대로 해 먹고는 뿌듯해한 적도 있었지만, 시장 볼 타이밍을 놓쳐 결국 밖에서 사 온 닭강정에 주먹밥을 겨우 해 아이들에게 먹인 날도 있었다.
그런 하루하루의 조각들이 모여 2025년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돌아보니 괜히 눈물이 난다. 좋았던 날이 없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지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들은 생각하면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이켜보며 좋았고 싫었고 아름다웠고 슬펐던 일들을 떠올려 정리하려는 습관은 12월의 사물 조각보와도 닮았지 싶다.
조각보는 물건을 싸서 보관해 두거나 운반하는 보자기의 일종으로, 바느질하다 남은 천을 하나하나 이어 만든 것이다. 보자기에는 궁궐에서 사용했던 화려한 궁보나 민간에서 사용한 민보, 여러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조각보, 섬세하고 기려한 자수가 놓인 수보, 비단을 사용한 명주보, 면을 사용한 무명보, 금가루로 찍어 만든 금박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도 조각보는 궁에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고 주로 일반 서민층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민가에서는 재료가 워낙 귀했을 테니 바느질 후 남은 자투리 천을 모아두었다가 적당한 크기와 색상을 배치하여 이어 붙였을 것이다. 조각보는 조각천을 잇는 행위 자체가 장수를 염원하는 의미와 더불어 악귀를 막는 그물 역할을 한다고 믿어 벽에 걸어 장식하기도 했다.
조각보에는 사각형, 삼각형, 동심원형, 바람개비형, 수직형, 여의주형, 자유형 등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자유형 조각보에서는 비정형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색상과 크기도 제각각인 - 어찌 보면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이는 하루하루 삶의 조각과도 비슷할 - 자투리 천은 보자기라는 큰 틀 안에서 자신만의 조화를 찾아 은은하게 드러낸다.
십여 년간 레터프레스 작업을 해오면서 나름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 전통 사물을 주제로 하여 엮은 2025년 달력 ‘아취(雅趣, 고아한 정취 또는 그런 취미)’를 만들었다.
1월은 새해의 목표와 의지를 형상화한 솟대
2월은 액운을 떠나보내고 소원과 기원을 담아서 날렸던 연
3월은 매일 반복해서 쓸고 닦으며 주변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모시 빗자루
4월은 금방 먹을 떡이라도 살(무늬)을 박아 정성과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던 떡살
5월은 한 사람만을 위한 존중과 고아(고상하고 우아한)함이 담긴 소반
6월은 말없이 여덟 개의 덕을 실천하는 부채
7월은 더운 여름밤 기꺼이 껴안고 잠들 수 있는 죽부인
8월은 끊임없이 질문한 장인들에게 주어진 놋의 금빛 대답, 유기(鍮器)
9월은 휴대용 물컵인데도 미친 미감을 놓치지 않은 표주박
10월은 추석 이후 시작되는 본격 추수기에 새참 담아 나갔을 광주리
11월은 따뜻함이라는 실용성과 더불어 불멍으로 마음의 회복까지 도운 화로
그리고 드디어 12월,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 붙인 듯한 조각보에 이르렀다.
만들 때는 올해의 달력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고아(高雅: 뜻이나 품격 따위가 높고 우아하다)’하게 보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으나 실제 사용하는 동안에는 부끄럽게도 미련하고 우악스러운 적이 참 많았지 싶다. 그래서 한 해를 돌아보며 괜히 슬픈 느낌이 들었을까.
조각보 만들 때 사용하는 천 조각은 따로 반주머니 형태의 보자기, 방언으로 ‘맘부’에 모아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적당한 크기와 색상의 조각을 찾아 썼다고 한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떠올리는 나의 기억들은 모두 나의 맘부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 맘부 속에서 나온 올해의 조각들을 어떻게 찾아서 이어 붙일지는 내 몫으로 남아있다. 조각 하나하나는 엉성하고 부족할 수 있지만 한군데 이어 놓으면 조각보처럼 아름다울 수 있게, 잘 붙여 보아야겠다.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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