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시칠리아행 배를 타려면 담배 가게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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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더봄] 시칠리아행 배를 타려면 담배 가게로 가세요

여성경제신문 2025-12-18 10:00:00 신고

구아르디아의 민박에서 아침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인간의 행위일 테지만 우리는 아침으로 나온 것을 꼼꼼히 챙겨 점심까지 도시락으로 쌌다. 이탈리아에서 도시락을 싼다는 것은 일종의 소심한 혁명과 같다.

맛있는 먹거리에 열정적인 현지인들 틈에서, 우리는 식상하게도 과일, 빵, 치즈를 챙겼으니 몹시 심심한 피크닉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완벽하게 '외부인'의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맛보다는 시간과 비용에 진심을 다한 도시락을 끼고 시칠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빌라 산 지오반니 항구에 도착해서 티켓 오피스를 찾아 헤맸다. 어디에도 매표하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차로 빙글빙글 돌다가 주유도 할 겸 주유소로 들어가 물었다.

"페리 티켓을 사야 하는데 매표소는 어디에 있나요?"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놀랍고도 익숙한 이탈리아의 미스터리였다.

"매표소라니? 담배 가게(토바코)를 찾아야지!"

시칠리아행 페리 표를 파는 곳은 "담배 가게"인 것이다. 진심으로 묻고 싶은데, 도대체 어떤 나라가 (물론 이탈리아지만) 페리 티켓을 담배 가게에서 팔게 만든단 말인가? 담배와 페리? 후니와 미 선배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연거푸 물었다. 

"토바코? 토바코라고요?"

둘은 머릿속의 논리 회로에 스파크가 튀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순간 포르토 베나레로 가는 버스표를 사기 위해 길 잃은 양처럼 헤맸던 기억이 떠올렸다. 버스표, 배표 할 것 없이 티켓을 파는 매표소라든가 하는 상식은 이탈리아에서는 잠시 신발 밑창에 깔아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맞아 맞아. 버스표처럼 배표도 토바코에서 파는 거였어!"

시칠리아의 틴다리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박재희
시칠리아의 틴다리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박재희

우리는 황당한 시스템에 체념하고 한결 편안한(혹은 정신 놓은) 마음으로 담배 가게를 찾아가 문을 열었다. 차 한 대에 사람 셋, 70유로 조금 넘는다. 계산은 간단했고, 설명은 없었다.

얌전하게 매표하고 페리에 올라 바다를 건넜다. 메시나 해협은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 본토 칼라브리아주를 잇는 좁은 해협이다. 가장 좁은 거리는 2킬로미터도 되지 않으니 해협을 건너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고대의 사람들도 걸어 넘듯 했을 것이다. 육지에서도 보이는 섬, 장판처럼 잔잔한 바다. 파도는 거의 없고, 바다는 땅처럼 평평하다. 이런 바다라면 이동은 두려움이 아니라 일상이다.

가슴 벅찬 이름, 시칠리아에 도착했지만 처음 맞이한 풍경은 의외로 무미건조했다. 공장 지대를 지나는 듯한 도로, 특별한 표정 없는 도시 외곽.

"여기가 바로 마피아와 '대부'의 섬이라고? 흠···."

섬에 들어섰다는 감각은 한참 뒤에야 따라왔다. 나는 전날 밤 잠꼬대를 심하게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차에 타자마자 숙면의 신에게 붙잡혀 깊이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주변 풍경은 이미 드라마틱하게 바뀌고 있었다. (역시 좋은 잠은 최고의 여행 동반자다.)

시칠리아의 도로를 달릴 때면, 설명하기 어려운 '홀리는' 순간이 온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는 분명한데, 산 위에 있는 어떤 장소가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낚아챈다. 유적이거나, 도시이거나, 혹은 그냥 오래되어 보이는 것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르는 곳.

틴다리(Tindari)가 정확히 그랬다. 산 위에서 "야, 너희들 이리로 와봐" 하고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가보기로 했다. 바쁠 것도 없고 여기는 이탈리아니까. "계획대로 움직이는 건 이탈리아 방식이 아니잖아." 이런 충동적인 합의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틴다리는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였고, 지금은 유적과 성지가 함께 있는, 역사의 잡탕 같은 곳이었다. 정확히는 검은 마돈나로 알려진 성모 성당(Basilica Santuario di Maria SS. del Tindari)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려면, 차를 세우고 셔틀을 탄 뒤 또다시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야 했다. 약간 번거롭지만, 위에 올라가면 그 모든 자잘한 귀찮음에 대해 불평할 생각이 싹 사라진다.

이곳에는 세 겹의 시칠리아가 포개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유적, 중세 이후의 성당, 그리고 검은 피부의 마돈나. 이미 파에스툼에서 너무 완벽해서 질릴 지경인 고대 유적을 보고 왔기 때문인지, 유적 자체는 그저 '오, 또 유적이군' 하는 정도였다.

나를 압도한 것은 비현실적인 풍광이었다. 여기는 페르세포네의 땅답게 꽃이 차고 넘친다. 마치 생명의 계절과 죽음의 계절을 오간 여신의 신화가 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공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바다.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펼쳐져 하늘과 섞여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단순히 맞닿아 있는 게 아니라 깊이 은밀하게 교접 중인 것처럼 보였다. 경계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바라본 것도 결국, 바다였다. '어쩌면 이리도 신비로운 파랑이고 난리야 정말.'

틴다리의 명물로 유명한 검은 피부의 마돈나 /사진=박재희
틴다리의 명물로 유명한 검은 피부의 마돈나 /사진=박재희

틴다리 성당이 특별한 이유는 그 내부에 있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성당 내부는 놀라울 만큼 섬세한데, 저 작은 돌멩이들을 다 붙인 사람의 인내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를 묻게 만든다.

물감으로 칠하라고 해도 어려울 성화들이, 모두 깨알 같은 모자이크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십자가의 길 하나하나가 수천 개의 타일로 완성되어 있다. 가까이서 보면 노동의 흔적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신앙이 된다. 이것이 바로 건축의 마법이다.

그리고 이곳의 중심, 검은 마돈나가 있다. 시칠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검은 성모' 신앙은 단순한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섬을 지나간 수많은 이주민, 정복자,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기억이 겹친 상징처럼 느껴진다. 피부색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의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동방에서 오다가 햇볕에 좀 탔거나.)

긴 드라이브 끝에 두 다리로 걷는 산책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몸이 먼저 풀리고, 생각은 뒤늦게 따라온다. 틴다리는 그런 장소였다.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었고, 구태여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충분한 곳이었다. 그냥 가만히 바다를 바라봐도, 하늘에 취해 어디로 걷는지 모른 채 걸어도 그 자체로 시칠리아였다.

토비아에서 장을 봤다. 이탈리아의 마트는 늘 과일 코너가 핵심이다. 우리는 납작 복숭아를 수북하게 담아 여러 봉지 사고 숙소에 돌아와 과일로 포식했다. 말 그대로 과일 폭식이었다. 복숭아는 입에 넣자마자 혀 위에서 터지며 달콤했고, 우리는 정말로 시칠리아의 진짜 시작점에 선 기분이다.

시칠리아의 일정은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주일 가지고는 겉핥기조차 할 수 없을테니까. 계획을 세울수록 틈이 보였다. 우린 그저 되는대로 하자며 결정을 미루었다. 어차피 시칠리아에는 다시 와야 할 것이다. 예감이 아니라, '담배 가게에서 페리 표를 사는 것처럼' 확정된 운명에 가까웠다.

시칠리아의 주기, 메두사의 머리와 시칠리아섬의 삼각형을 세 개의 다리로 상징한다. /사진=박재희
시칠리아의 주기, 메두사의 머리와 시칠리아섬의 삼각형을 세 개의 다리로 상징한다. /사진=박재희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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