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세계 최대 결제 네트워크 비자가 본격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에 발을 들였다. 17일(현지시간) 비자는 자사 네트워크 금융기관들이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USDC를 통해 정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상업 파일럿 단계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초고속 블록체인 솔라나 기반으로 구축된 이 시스템은 크로스 리버 뱅크와 리드 뱅크가 첫 파트너로 참여해 빠른 처리 속도를 구현하고 있다.
이번 확대는 수년간의 실험 끝에 나온 결과다. 비자는 2021년부터 USDC 정산을 실험해 왔으며, 2023년 9월 솔라나를 포함한 파일럿을 공식 발표한 바 있다. 비자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과 협력해 Arc 레이어1 블록체인을 인프라로 활용하며 직접 노드 운영까지 맡을 예정이다.
블록체인 기반 정산의 핵심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다는 점이다. 금융기관들은 주말이나 공휴일 상관없이 365일 24시간 정산이 가능해지며 블록체인을 통한 자금 이동으로 재무 및 유동성 관리 효율이 크게 개선된다. 기존 은행 망을 이용한 정산이 국경을 넘을 때 며칠씩 소요되고 주말·공휴일에는 가동을 멈추는 것과 달리 블록체인 기반 정산은 이론상 365일 24시간 가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별점이다.
비자뿐만 아니라 다른 글로벌 금융기관들도 블록체인 기술 도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JP모건은 블록체인 기반 결제·유동성 플랫폼인 Kinexys를 통해 누적 거래액 1조5000억달러, 약 2000조원 이상을 처리했다. 이 플랫폼은 은행 간 대규모 결제와 레포거래 등에서 자산과 현금의 교환이 동시에 완료되는 '원자적 결제' 방식으로 결제 리스크를 줄이는 구조로 설계됐다.
공공 부문에서도 유사한 혁신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뉴욕혁신센터의 'Project Cedar'는 도매형 CBDC를 이용한 외환결제에서 10초 안팎의 원자적 결제와 실시간에 가까운 정산을 시연했다.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코인 PYUSD를 발행해 결제망에 통합하고 있으며, 일부 대형 금융기관들은 도매 영역에서 자체 토큰과 블록체인 인프라를 활용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국내 금융권의 상황은 이와 사뭇 대조적이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토큰화 시도는 대부분 정부의 '혁신금융서비스' 규제 샌드박스 테두리 안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일부 은행들이 조각 투자 업체와 협력해 토큰증권 발행 및 유통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나 자본시장법 개정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국내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가 시작됐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아발란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외국인 관광객 부가가치세 환급 절차를 디지털화하는 시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파이어블록스, 마스터카드, 월드페이 등 글로벌 결제 인프라 기업들과 협력해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한 자동화된 환급 시스템을 구축하고,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실시간 정산 가능성을 검증하는 게 목표다.
이 프로젝트의 배경에는 급증하는 외국인 관광객 수요가 있다. 2024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1637만명으로 전년 대비 48.4% 증가하면서 기존 종이 서류 기반 환급 절차의 디지털화 필요성이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최운재 NH농협은행 부행장은 "스테이블코인 기반 환급 모델은 블록체인이 고객 경험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프로젝트는 실제 고객 자금이나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은 개념증명(PoC) 단계로, 아직 기술적 타당성과 운영 가능성을 검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번 시범운영은 한국이 추진 중인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은 은행만 발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반면 민간 기업들은 "비은행 기관에도 발행권을 허용해야 시장 경쟁과 혁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기술적 제약도 상용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국내 금융권의 고질적 규제로 꼽히는 '망분리' 규제가 대표적이다. 블록체인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외부 네트워크와의 연결이 필수적이지만 국내 금융사들은 보안을 이유로 내부망과 외부망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어 글로벌 블록체인 노드를 직접 운영하거나 연동하는 데 기술적 제약이 크다.
금융당국이 최근 망분리 규제 완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실제 블록체인 정산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기에는 여전히 보안성 검토와 책임 소재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이런 가운데 해외 주요국들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연합은 MiCA 규제를 2024~2025년 단계적으로 시행하며, 스테이블코인에 발행 규율과 준비금 요건 등을 명문화해 결제 수단으로의 사용을 전제로 한 법제화를 진행 중이다. 일본은 개정 자금결제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은행 등 허가된 기관만 발행 가능토록 하고 준비금과 환매 의무를 규정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법제화 작업은 지체되고 있다. 한국은 현재까지 원화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포괄하는 별도 법률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전자금융거래법과 특금법, 자본시장법 등 기존 법령 아래에서 부분적으로만 규율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규제 속도가 곧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입을 모은다. 안유화 중국증권행정연구원장은 "글로벌 금융은 실시간 원자적 결제를 향해 가고 있다"며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규제의 속도가 금융의 미래를 결정짓는 시대"라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일부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 인프라를 도입하는 가운데 한국은 여전히 가상자산에 대한 우려로 계좌 발급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며 "규제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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