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025년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제시한 ‘핵심5’(Core 5) 구상은 세계 질서 재편의 신호탄이다. 이 구상은 미국·중국·러시아·인도·일본 등 5대 강국 중심의 정례 협의체(C5)를 제안하는데, 자유민주주의나 경제발전 수준과 무관하게 인구 1억명이 넘는 거대국들을 모아 G7처럼 정상회의를 여는 형태다. 첫 의제로 중동 안보 등 글로벌 현안을 다루겠다는 이 안은, 더 이상 냉전 이후처럼 서방 동맹(G7)만으로 세계를 이끌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의 산물이다. 실제로 NSS 초안은 “(1극) 패권은 불가능하고 추구할 가치도 없다”며 미국 단일 패권 시대의 종언을 담담히 인정했다.
이처럼 미국조차 다극체제를 수용하면서, 국제무대엔 새로운 힘의 역학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동맹보다 국익을 공유하는 파트너십을 강조하며, 과거 G7이 배제했던 중국·러시아까지 테이블로 끌어들여 ‘신(新)콘서트’를 꾸리려 한다. 유럽은 이 핵심5에서 제외돼, 미·EU 중심이던 기존 국제질서에 균열이 감지된다. 문제는 이러한 ‘빅5’ 담합 구조에서 한국 같은 중견국의 목소리가 소외될 위험이다. 강대국들이 글로벌 의제를 좌지우지하는 틀 속에서 한국의 안보·경제 이익이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 새 질서에서 자국 이익을 주체적으로 지켜낼 전략이 한층 중요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종전을 위한 ‘초대형 딜’로 NATO 수준의 안보 보장 구상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5일 진행된 미·우 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정식 가입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나토에 준하는 안보 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미국의 이 같은 구상을 사실상 수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평화 협상 성사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크라이나 측도 서방으로부터 확실한 안전 보장을 확보할 수 있다면, 나토 직접 가입에 대한 기존 입장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NATO급 안전장치를 특정 국가에 부여하는 구상은 그 자체로 중대한 전략적 함의를 안고 있다. 이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방위를 사실상 자국 방위와 동일 선상에 두겠다는 의미여서, 러시아와의 재충돌 시 미국이 자동 개입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제도적으로 떠안는 셈이다.
미국 내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경고음이 분명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방적 안보 보장은 곧 미·러 전면전을 각오하겠다는 선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시나리오는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군사력이 유럽에 장기간 묶일 경우, 중국이 대만을 겨냥하거나 북한이 한반도에서 도발에 나서는 등 아시아 전반으로 위기가 연쇄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한국에 이 시나리오가 주는 함의는 막중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 수준 보장이 현실화하면 미군 전력과 전략자산이 유럽에 분산돼, 인도·태평양 방위공약의 실효성이 약화될 수 있다. 한반도 방위를 떠받치는 미군의 ‘양대 축’(유럽·아시아) 중 유럽 비중이 커지면, 북한·중국을 억제하는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저하될 소지가 있다. 또한 한국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를 인도적·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치명적 무기 제공은 자제해 대러 외교 여지를 남겨왔다. 그러나 미국이 나토급 개입을 결단하면 한국에도 더 큰 참여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수지원 확대나 러시아 추가 제재 동참 등 한미동맹의 글로벌 역할이 요구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한국은 유럽 전쟁의 파급이 동아시아 안보까지 미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균형외교 하나로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조속한 평화정착과 확전 방지를 지지하며, 한반도 방위 공백이 없도록 미국과 긴밀히 조율해야 한다.
전쟁은 이제 흑해에서 민간 선박과 항구를 위협하는 해양전선으로 확산되고 있다. 올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흑해항을 미사일·드론으로 공격해 터키 선사 소유의 곡물운반선 등에 피해를 입혔다. “우크라이나를 바다에서 고립시키겠다”는 푸틴의 보복 경고가 현실화되며, 오데사주(州) 항만에 정박 중이던 터키 선적 상선이 드론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국제 물류에 전운(戰雲)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도 가만있지 않았다. 15일, 우크라이나는 수중 드론으로 흑해 노보로시스크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해군 잠수함을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해군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자평한 이 공격으로 러시아 순항미사일 잠수함을 무력화시켰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는 피해를 부인하며 반격 의지를 드러냈다. 흑해는 순식간에 서로의 생명선을 노리는 무대로 변했고, 민간 선원과 해운을 볼모로 한 공방이 격화됐다. 실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해상 드론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제3국 선박이라도 우크라이나에 협조하면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위협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 아르세니오 도밍게즈는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어, 교전국 모두 민간 선원과 상선을 공격 대상에서 제외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분쟁이 격화돼도 선원은 전쟁 도구가 아니다. 선박과 항만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며, 흑해의 항행 안전 보장을 위해 대화 지원 의사까지 밝혔다. 이 성명은 국제 해운의 안전망마저 위태로운 현실을 보여준다.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규범이 강대국 충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자, UN 산하기구 수장이 나선 것이다.
한국에게 흑해 사태는 남 일이 아니다. 한국은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상운송에 의존하는 해양국가다. 동아시아에서 분쟁이 일어나 흑해처럼 상업용 선박이 공격 대상이 된다면, 원유·천연가스 수급과 수출 물류가 마비돼 국가 생존이 위협받는다. 특히 동중국해·남중국해는 한국 경제에 있어 ‘해상 에너지 생명선’이나 다름없는데, 미·중 대립이 심화될 경우 이 바닷길의 안전도 장담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은 IMO 등 국제기구를 통해 분쟁시 해양 안전 확보를 지지하고, 자국 선박과 해상교통로 보호 능력을 키워야 한다. 흑해에서 커져가는 해양안보 위기는 곧 다가올지 모르는 동아시아 해양 분쟁의 전조인 셈이다.
세계 질서를 뒷받침해온 기존 다자체제들도 기능 약화와 내분에 직면해 있다. G7은 냉전 후 서방의 결속으로 국제 현안을 주도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제 규모 2위 중국이나 인구 대국 인도 등이 빠져있어 대표성의 한계가 뚜렷하다. 미국조차 G7 틀에 얽매이지 않고 C5 구상을 내놓은 데서 알 수 있듯, 부유한 자유민주주의국가 클럽으로는 세계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 중이다. 반면 G20은 선진국과 신흥국을 망라한 포럼으로 자리잡았으나, 최근 러·우 전쟁 등을 계기로 회원국 간 심각한 분열을 보이고 있다. 2023년 뉴델리 G20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성명 문구를 놓고 서방과 러시아·중국이 대립해 유혈 침공에 대한 직접적 비난조차 못 담은 애매한 합의문이 나왔다. 2024년, 2025년에도 주요 의제마다 미·중 간 견해차, 제재에 대한 남반구 국가들의 반발 등으로 G20의 조정 역량이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극화 시대, 다자 협력보다 블록 대립이 두드러지면서 G20의 결정력은 희미해지고 있다.
WTO 체제도 흔들린 지 오래다. 미국의 반대로 WTO 분쟁해결기구(상소기구)는 수년째 마비 상태이고, 미·중 무역전쟁 이후 각국은 안보를 이유로 한 수출통제와 보복관세 남발로 다자무역 규범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세계 교역 질서는 WTO 대신 미국 주도의 경제블록(IPEF 등)이나 중국 주도의 역내협정(RCEP 등)으로 쪼개지고 있다.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한국으로서는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 것이다. 반도체, 자동차 등 핵심산업에서 미국의 대중국 수출규제 동참 요구를 받는 동시에, 중국 시장 의존도도 높아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WTO를 통한 범세계적 규범엔 한계가 분명해졌고, 한국은 양자·소다자 협정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현실이다.
NATO 역시 겉보기와 달리 내적 과제를 안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으로 냉전 이후 최대의 단결을 이뤘다고는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은 NATO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실제 공개된 NSS에는 “영원한 NATO 확장은 끝내야 한다”는 파격적 표현까지 담겼고, 미국은 유럽 방위에서 한 발 물러나 유럽 각국이 자구 노력을 하라고 압박했다. 유럽은 오랜 평화로 군비를 줄인 탓에, 정작 러시아와 맞붙을 경우 재래식 전력 열세와 방산 생산능력 부족이 드러난 상태다. 미군 없이 유럽 자체로 러시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NATO가 미국에 편중된 동맹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국 내부에선 “유럽 방위는 미국 책임이 아니다”는 고립주의 정서도 상존한다. 이는 NATO의 미래에 잠재적 불안요인이다. 나아가 NATO가 인도·태평양 안보로 역할을 넓히려 해도, 회원국 간 이해 상충으로 단일 전략을 내기 쉽지 않다. 결국 G7, G20, WTO, NATO 등 기존 국제질서의 기둥들이 균열을 보이는 가운데, 세계는 명실상부한 다극 체제로 이행 중이다. 한국처럼 중견국가들은 이념보다 실리를 좇는 유연한 대응으로 살아남아야 함을 이 변화가 보여준다.
이러한 다극화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독특하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인도 등 C5로 언급되는 모든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경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다. 인접한 미·중·러·일 4강에 더해, 인도 역시 인도-태평양 지역 강국으로 부상하며 한국 외교의 고려대상이 됐다. 거의 모든 대국과 지리적·전략적으로 접점을 갖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 특수한 환경은 한국에 이중의 의미를 던진다. 하나는 위기의 교차로란 점이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안은 미·중 패권경쟁, 미·러 대립, 중·일 분쟁 등의 격전지로 비화할 위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기회의 요충지란 점이다. 강대국들이 모두 중요시하는 요지인 만큼, 한국이 중재자나 핵심 파트너로서 가치가 클 수 있다.
우선 미국은 한반도 안보의 핵심 동맹이다. 70년 넘게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북한의 침략을 억제해왔다. 동시에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한국의 협력을 기대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에도 비용 분담과 자국 우선을 강하게 요구하는 인물이다. 한국은 과거 트럼프 1기 때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진통을 겪었고, 2기에서도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나 동맹 비용 증액 압박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 기술봉쇄와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한국 기업에 득실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요컨대 미국과의 동맹 유지는 한국 안보의 대들보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지키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정교한 외교술이 요구된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며 지리적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이다. 미국의 전략적 경쟁 상대로 지목된 중국은 한반도 문제(북핵)에서도 영향력이 크다. 시진핑 지도부는 한국에 미·중 사이 ‘줄타기’를 압박하며, 자국에 불리한 움직임에는 거칠게 대응해왔다. 2017년 사드(THAAD) 한반도 배치 시 중국의 전방위 경제보복은 한국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동시에 중국은 북한에 대한 제재 동참 여부나 한반도 유사시 개입 등 안보 측면에서 변수이기도 하다.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지 못하면 한국은 안보·경제 복합위기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미국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중국과는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는, 고차원 균형 외교가 필수적이다. 심리는 외교의 언어가 아니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겪어왔으나, 동시에 한미일 안보 공조의 축이다. 북한 미사일 경보 공유, 해상초계 협력 등 일본과의 협력은 한반도 방어력에 기여한다. 2025년 현재 한일 양국은 과거사 현안을 봉합하고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특히 이재명 정부는 “미래지향적 실용외교”를 기치로, 일본과의 경제·안보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다만 일본 역시 C5의 일원으로 미·중 경쟁의 핵심 플레이어다. 일본이 미국 편향으로 가속화할수록 한국은 한중 관계 사이에서 상대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은 한미일 협력과 한중 협력을 모두 유지하면서, 한일 간 불필요한 역사 갈등을 재발시키지 않는 성숙한 외교관리가 요구된다.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북쪽에 인접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북핵 문제 열쇠를 쥐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군사협력까지 진행하며 한반도 안보의 잠재적 위험인자가 됐다. 한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서방 제재에 동참했지만, 가급적 러시아와 외교 채널을 열어두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러시아를 과도하게 자극하면 북핵 제재 공조 붕괴나 안보리에서 한국에 불리한 행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의 에너지·자원은 한국 경제에도 중요해 전면 결별이 현실적이지 않다. 균형외교 차원에서 한국은 러시아와 대화 공간을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국제 노력에 기여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추구해야 한다.
끝으로 인도는 한반도 인근 국가가 아니지만,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으로 미국이 부상시킨 나라다. 세계 1위 인구 대국인 인도와 한국은 민주주의, 식민지배의 역사 등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인도와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해 경제·방산 협력을 강화해왔다. 인도는 중국 견제에 활용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한국에 전략적 자산이다. 예컨대 한국산 무기(자주포 K9 등)의 인도 수출은 양국 안보협력을 심화시키고, 중국에 대한 완충 지대를 넓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인도 시장은 포스트 중국으로 한국 기업들이 주목하고 있어 경제적 가치도 막대하다. 다극화 속 중견국 연대 측면에서 한국-인도 협력은 향후 국제 무대에서 상호 지지 기반을 확충하는 데 도움 될 것이다.
이렇듯 한국은 세계 주요 5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의 십자로에 서 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다른 쪽에서 압박이 오기 쉬운 구조다. 반대로, 이들을 균형 있게 활용하면 어떤 나라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은 이 복잡한 강대국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기회로 전환시키는 외교력에 달렸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주춧돌이다. 현재 약 2만8500여명의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며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있다(미 의회는 향후 주한미군을 이 수준 이하로 임의 축소하지 못하도록 방어수권법에 명문화해뒀다). 주한미군은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 예하 전력으로, 일본·괌 등 역내 미군과 연계된 전략적 억지망의 한 축이다. 특히 주한미군은 평시에도 연합사령부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과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CFC)는 미 4성 장군이 사령관, 한국 4성 장군이 부사령관을 맡아 양국 군대의 혼연일체 지휘체계를 구현해왔다.
향후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은 한미동맹 구조 변화의 핵심 의제로 남아 있다. 한국은 이미 1994년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받았고, 궁극적으로 전시에도 한국군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재명 정부는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성취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에 따라 한미 간 조건충족 평가가 가속되고 있다. 미측도 동맹 현대화 차원에서, 한국이 충분한 지휘·정보역량을 갖출 경우 전작권 전환에 열려 있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한국이 더 책임을 지라”는 기조에 비춰보면, 오히려 조건부 전환을 지지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전작권이 넘어와도 미국이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연합사령부 부사령관으로서 계속 관여하고, 유사시 증원 전력과 핵우산 제공을 통해 한국 방위를 지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전작권 전환이 동맹 약화나 미군 철수 신호로 비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조건에 기초한 단계적 전환은 오히려 국군 주도 억지력을 키워 중국의 팽창에 대응하는 역내 동맹 억지력 강화라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 반대로 충분한 대비 없이 성급한 전환이나 주한미군 축소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한국을 뒷전으로 한다는 인상을 주고 동맹 신뢰를 해칠 위험이 있다. 즉, 전작권 전환은 한미 신뢰와 억지력을 동시에 높이는 방향으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양국 전략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인도-태평양 사령부와 동맹의 확장성도 주목된다. 미국은 한국을 역내 안보 네트워크에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 시기 맺어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합의는 사실상 3자 안보협의체의 상설화를 의미했고, 북한 뿐 아니라 중국 견제까지 염두에 둔 정보공유·훈련 등이 추진되었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한미일 협력의 큰 틀은 유지하되, 일본과의 민감 현안은 세심히 관리하는 노선을 취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NATO 파트너, 쿼드(Quad) 협의 참여 등을 통해 유럽과 인도태평양을 연결하는 글로벌 동맹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다만 균형외교 관점에서, 한국은 동맹의 광범위한 연대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 범위를 신중히 설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만 해협 유사시 미측 지원 문제에 대해, 한국은 “한반도 상황과 직결된 경우에 협력”이라는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중국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면서도 동맹에 대한 기본 책무는 다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한다. 향후 동맹이 영내에서 중국·북한과 충돌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한국은 자국 안보 이익에 부합하는 지원만을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동맹의 무임승차론을 피하면서도 불필요한 외부 도발을 최소화하는 길일 것이다.
한미동맹의 미래 방향은 기술과 영역 측면에서도 확대가 예상된다. 사이버 안보, 우주 협력, 방위산업 및 첨단기술 공유 등 동맹의 신영역 협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양국은 확장억제 강화 메커니즘을 가동 중이며, 미국 전략자산 전개의 상시화, 핵협의그룹(NCG) 운영 등이 그 예다. 이재명 정부는 동맹의 핵심 축으로 확장억제 실효성 제고를 내걸고, 한국의 자체 정찰위성 확보와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동맹 차원에서도 한국의 방어능력 기여 확대로 이어져, 미국의 부담을 덜고 대중국 견제력에도 보탬을 주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한국은 미국과의 방산협력을 통해 제3국에 대한 공동 방산수출, 군사훈련 지원 등 동맹의 지역·글로벌 공공재 제공 역할에도 점진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역할 확대는 어디까지나 한국 국익과 능력 범위 내에서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국내 공감대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
정리하면, 한미동맹은 정체된 동맹이 아니라 진화하는 동맹이다. 현 구조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핵심이지만, 미래에는 한국의 자주적 기여가 증대된 보다 대등한 동맹으로 변화가 예상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상호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접근법은 동맹을 튼튼히 유지하되 자율성과 실용성을 높여 가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진정한 파트너로 인식하게 하고, 한국도 동맹 속 자율성을 확보하는 win-win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복잡한 환경 속에서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 노선은 뚜렷한 기조를 보인다. 바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다른 말로 균형외교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이념과 진영 논리가 아닌 국익과 실용을 최우선에 둔 외교를 천명했다. “현재는 각국이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시대다. 경직된 진영논리로는 국익을 지킬 수 없다”는 그의 언급은, 대외정책에 유연한 현실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흔히 균형외교를 미·중 사이 줄타기 정도로 오해하지만, 정부는 “물리적 균형이 아니라 상황별 국익 극대화”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즉, 한미동맹을 축으로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되, 그 토대 위에서 중·러 및 북한과도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다층적 전략이 바로 실용외교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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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식 실용외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먼저 한미 관계 복원과 격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해 동맹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 당시 난항을 겪던 방위비 분담 협상과 무역현안에서 호혜적 타결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이 제안한 3500억 달러 규모의 전략투자 펀드 조성 문제를 조율해,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으로 타격받은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 지원책을 미국이 약속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다는 평가다. 한미 정상은 또 동맹 현대화를 위한 안보 협력을 계속 협의하기로 하였고, 이는 10월 한국 개최 APEC 정상회의에서 구체화됐다. 한국은 경주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주최해 미·중 정상을 한자리에 끌어모으고, AI 거버넌스 원칙 등 다자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냈다. 곧이어 마무리된 한미 간 협상에서는 미측의 첨단무기 기술 공유와 한국 측의 방산 수출 확대 지원 등에 합의가 이르렀다. 이러한 외교 성과들은 모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균형외교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대중국 채널 복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한중 정상회담이 재개되고, 고위급 전략대화가 부활하면서 사드 이후 얼어붙었던 신뢰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대만해협, 남중국해 발언에 동참하면서도, 새로운 사드 추가 배치는 없을 것임을 시사하는 등 중국의 핵심 관심사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에도 과거보다 건설적으로 참여해 협력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런 노력 덕에 중국도 한국에 대해 한때 취했던 문화·관광 제재를 풀고 경제교류를 재활성화하는 조짐을 보인다. 요컨대 “미국엔 동맹으로서 확실히 기여하고, 중국엔 이웃으로서 진정성을 보인다”는 투트랙 메시지가 주효하고 있는 셈이다.
대러시아 외교 역시 실용 노선을 취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를 공개 지지하되, 치명적 무기는 직접 제공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다. 인도적 지원과 재건 협력에는 적극 참여하면서, 러시아와는 차관 채널 등을 통해 북한 문제 논의 및 경제협력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있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북한-한국을 잇는 경제벨트 구상을 재개하자”는 메시지를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러시아도 한국을 완전히 적대시하면 얻을 게 없다는 점을 알기에, 현재로서는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 유지나 교민 보호 등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같은 균형 잡기는 만에 하나 미·러가 관계 개선을 모색할 때 한국이 소외되지 않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북한 및 주변국과의 관계 관리에서도 실용 기조는 나타난다. 이재명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의 문은 열어두는 투트랙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북한이 위성발사체를 발사했을 때 국군은 한미연합으로 즉각 대응훈련을 진행해 군사적 단호함을 보였다. 동시에 유엔 제재 틀 내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 제안을 하고, 조건부 평양 남북정상회담 개최 의사도 밝혔다. 북한이 아직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국제사회에는 한국이 한반도 평화의 주도적 당사자임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과거사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실용적 해법을 모색했다. 이전 정부에서 합의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존중하면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도록 하고 한일군사정보협정(GSOMIA)을 정상화하는 등 주고받는 접근으로 윈윈을 도모했다. 이는 과거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의 대일 접근을 뛰어넘어 국익을 위한 실용 협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재명식 균형외교의 큰 원칙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한국의 논리와 관점으로 우리의 이익을 지킨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쪽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논리를 펴서 설득하고 협상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정부는 대통령실 내 국가안보실을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로 재정비하고, 각 부처와 민간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수렴해 다원적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국익 어젠다별로 최적 해법을 찾는 팀코리아 외교를 지향하는 셈이다. 대미 통상협상에는 산업부와 재계의 목소리를 모아 “미국에도 이득이 되는 한국의 투자”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대중 외교에는 학계·문화계의 식견을 빌려 “상호 존중의 가치”를 담론화하는 식이다. 이러한 전방위적 노력 덕분에, 불과 6개월여 만에 한국 외교는 국제무대에서 체급을 높였다는 평가를 듣는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과거 진보·보수 간 외교안보 노선 다툼이 줄고, “결국 실용이 답”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물론 균형외교가 만능열쇠는 아니다. 미·중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거나, 북한이 극단적 도발을 감행하면 한국의 입지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의 균형외교는 최소한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고 공간을 확보하는 외교로서, 현 국면에 최적화된 현실적 전략임이 분명하다. 강대국들이 각자도생으로 치달으며 국제 규범이 약화되는 시대에, 한국도 스스로 살아남을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 정부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 실용적 생존 전략이다.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줄서는 부속물이 되지 않고, 이웃과 협력하되 휘둘리지 않는 줄타기의 균형감각, 이것이야말로 한반도라는 풍랑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갈 현명한 항로다.
다극화로 재편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 외교가 직면한 과제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중심을 어떻게 세우느냐의 문제다. 전략적 모호성을 반복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국익을 지키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원칙의 명확화와 상황별 유연성의 결합이다.
한국은 우선 한반도 내 무력 충돌 반대, 국제법과 규범 존중과 같은 최소한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원칙은 협상의 출발선이지, 족쇄가 아니다.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국익을 기준으로 탄력적으로 대응하되, 기본 입장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누구의 압박에도 휘둘리지 않는 외교의 중심축을 확보할 수 있다.
동맹과 자주국방의 병행 역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한미동맹의 핵심은 확장억제와 연합방위태세다. 이를 한층 공고히 하면서도, 국군의 독자적 방위역량 투자는 멈춰서는 안 된다. 미군과의 핵심 정보 공유 체계를 정교화하는 동시에,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와 극초음속 무기 등 독자적 대응 수단을 확충해야 한다. 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동맹도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다자외교의 무대 역시 넓혀야 한다. G7이나 G20만으로는 다극화 시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렵다. MIKTA나 ASEAN+α와 같은 중견국 협의체를 적극 활용해 한국의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 국제 현안에서 단순한 참가국이 아니라, 해법을 제시하는 제안국으로 나설 때 강대국들도 한국을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강대국과의 양자 소통도 입체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인도와 각각 1.5트랙 대화 채널을 제도화해 오해를 줄이고 협력의 여지를 넓혀야 한다. 한중 전략대화의 정례화, 한러 안보대화 재개, 한일 미래위원회 설치, 한미 고위경제협의체 신설, 한인도 해양안보 포럼과 같은 구조적 소통 장치는 위기 관리와 공동이익 발굴의 기반이 된다. 이런 양자 협력이 쌓여 다자적 안정으로 이어지는 외교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안보는 이제 국가안보 그 자체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등 전략 산업에서 공급망 위험을 분산하지 못하면 외교적 선택지도 급격히 줄어든다. 미국과의 기술 동맹을 공고히 하되, 중국 시장과의 연결 고리는 현수교처럼 유지해야 한다. 동시에 동남아와 인도 등 대체 시장을 키워 리스크를 분산하고, 식량·에너지 자급과 비축 능력을 높여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경제 체력을 갖춰야 한다.
한반도 문제에서도 한국은 조정자가 아니라 당사자다.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논의는 언제든 주변국의 이해에 종속될 수 있다. 평화협약 로드맵이나 동북아 비핵지대 구상과 같은 창의적 해법을 한국이 먼저 제시하고, 미·중·러·일을 설득해 협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슈를 주도할 때 한국의 입장은 자연스럽게 존중받는다.
이 모든 전략의 지속 가능성은 국내 기반에 달려 있다. 외교·안보 전략을 둘러싼 초당적 공감대 없이는 어떤 노선도 오래가지 못한다. 정부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선택의 이유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설명해야 하고, 동시에 외교·안보 전문 인재를 체계적으로 키워야 한다. 인재 육성과 국제정세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국가의 협상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2025년 말 국제 질서는 불안정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와 늘 함께 온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균형외교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실용주의에 기반한다면, 한국은 협상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에 설 수 있다. 국익이라는 나침반을 놓치지 않고 항해할 때, 대한민국은 거센 파도 속에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지켜내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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