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양지원 기자 | 멸균우유의 무관세 수입이 가시화되면서 국내 유업계가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한·미,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내년부터 주요 수입국산 멸균우유의 관세가 사실상 철폐되면,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해외 제품의 국내 유입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보호 장벽이 낮아지는 환경 속에서 국내 유업계는 가격 경쟁에 매달리기보다는 사업 구조 자체를 바꾸는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국내 유업계의 공통된 대응 방향은 ‘탈 가격 경쟁’이다. 저출산 기조 속 단순 흰 우유 중심의 사업 모델로는 수입 제품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주요 유업체들은 프리미엄 제품 확대, 기능성·용도별 제품 강화 등으로 포트폴리오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우유는 프리미엄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출시한 ‘A2+우유’는 A2 단백질만을 함유하고 체세포수·세균수 1등급 원유를 사용한 제품이다. 지난 9월 기준 누적 판매량은 8250만개를 돌파했다. 수입 멸균우유와의 가격 경쟁보다는 국내산 원유와 품질을 앞세운 차별화 전략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매일유업은 유연한 사업 구조를 바탕으로 무관세 환경에 대응하고 있다. 흰 우유 의존도를 낮추고 단백질 강화 제품, 영·유아식, 특수의료용식품을 비롯해 크리스탈제이드, 폴바셋 등 외식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유업 외 영역으로 사업을 넓히며 수익 구조 다변화에 나서는 전략이다.
또 지난달에는 미국 캔디 브랜드 ‘너즈(NERDS)’의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체결하고 ‘너즈 구미 클러스터’ 등을 국내에 도입하기로 했다. 캔디·젤리 카테고리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남양유업은 경영 정상화 과정과 맞물려 체질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강 트렌드에 맞춘 제품 전략으로 변화를 주고 있으며, 발효유·단백질음료·가공유 등 주요 제품군 전반에 저당·고단백 콘셉트를 강화했다. 커피믹스 제품에도 변화를 줬다. 올해 농축 산양유 단백 분말과 저분자 피시 콜라겐을 배합한 ‘프렌치카페 카페믹스 스테비아 산양유 단백질’을 출시했다.
유업계 전반에서는 흰 우유 의존도를 점차 줄이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수입 멸균우유와 경쟁해야 하는 시장에서 국내 원유 가격은 사실상 조정 불가능한 비용”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멸균우유는 신선 우유와 달리 장기 보관이 가능해 수입 물량 조절이 용이한 만큼, 가격 차이가 벌어질 경우 국내산 원유 사용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로 멸균우유 수입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0년 약 1만1500t 수준이던 멸균우유 수입량은 2024년 4만8000t대로 크게 늘었다. 수입 확대가 현실화될 경우 그 충격은 낙농가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유업체들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원유 사용량을 줄이거나, 프리미엄·저온살균 등 일부 제품에만 국내산 원유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멸균우유 무관세 시대는 국내 유업계의 전략 전환뿐 아니라 낙농 정책의 지속 가능성까지 함께 묻고 있다. 가격 장벽이 사라지는 시장 환경 속에서, 국내 유업계가 어떤 방식으로 경쟁력을 재정의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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