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대한민국 재계에서 서정진만큼 극적인 궤적을 그린 인물을 찾기 어렵다. 망해가는 대우자동차의 샐러리맨에서 바이오 제국의 총수로, 이제는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의 민관공동위원장으로. 그를 따르는 수식어는 늘 극단을 오간다. 샐러리맨의 신화, 벤처의 대부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과대 포장의 달인이라는 비판도 따라붙는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과 함께 국민성장펀드의 투톱 체제를 구축하게 된 서정진 회장. 바이오 산업의 상징에서 국가 경제의 방향타를 쥔 인물로 변모한 그의 새로운 도전과 남겨진 과제들을 면밀히 살펴본다.
■벼랑 끝에서 일군 바이오 제국
서정진의 출발점은 처절했다. 195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건국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대우자동차 기획실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였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1999년 인천 연수구청 벤처센터 한구석에서 동료들과 창업했을 때, 20여 년 뒤 재계 10위권 그룹의 총수가 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초기 셀트리온은 생존 자체가 목표였다. 사채를 끌어다 쓰고 신체 포기 각서까지 작성했다는 일화는 창업 초기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바이오시밀러라는 당시로서는 미개척 영역을 발견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의 작은 벤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그는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램시마를 통해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성공 방정식은 과감한 도전과 속도전이었다. 남들이 신중하게 검토할 때 그는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추진력이 셀트리온을 시가총액 수십조 원의 바이오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셀트리온 3사 합병, 구조 개편의 명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서정진 회장의 최대 화두는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 셀트리온제약의 3사 합병이었다. 표면적 명분은 거래 구조 단순화와 투명성 제고다. 그동안 셀트리온이 의약품을 생산하고 헬스케어가 판매하는 구조는 일감 몰아주기와 재고자산 부풀리기 논란의 진원지였다. 서 회장은 합병을 통해 회계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고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 글로벌 빅파마와 본격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합병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고, 시장의 기대만큼 주가가 반응하지 않았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오너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합병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여전하다. 합병 후 실적 가시화가 지연된다면 이번 승부수가 역효과를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리더십의 양면, 소탈함과 제왕적 결정 사이
서정진의 리더십은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그는 스스로를 직원들을 위해 춤추는 광대라 칭하며 소탈한 면모를 보여왔다. 현장에서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정장 대신 점퍼 차림으로 공장을 누비는 모습은 특유의 팬덤을 형성했다. 반면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룹의 주요 결정이 서 회장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주주총회나 간담회에서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이 때로는 투자자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심어준다는 우려도 있다. 2030년 매출 목표나 해외 상장 계획 등 그의 발언은 화려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시장의 평가가 엇갈린다.
■국민성장펀드 공동위원장, 선택의 배경
최근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출범과 서정진 회장의 민관공동위원장 선임이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과 함께 투톱 체제를 구축하게 됐다. 정부가 서정진을 선택한 배경은 분명하다. 관료주의적 접근으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역동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글로벌 기업을 일군 경험과 노하우를 국가 펀드 운용에 접목하겠다는 의도다. 펀드의 핵심 투자처로 거론되는 AI, 반도체, 바이오 분야에서 서 회장은 바이오를 넘어 헬스케어 AI로 영역 확장을 시도하고 있어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대의 목소리는 크다. 서 회장 특유의 과감한 투자 결정이 국가 신성장 동력 발굴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셀트리온 그룹이 펀드의 직간접적 수혜를 받거나 특정 분야에 투자가 편중될 가능성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셀트리온의 서정진이 아닌 대한민국의 서정진으로서 공정하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AI 신약과 짐펜트라, 제2의 도약 선언
서정진 회장은 현재 제2의 창업을 선언한 상태다. 바이오시밀러 기업을 넘어 신약 개발 회사로의 전환이 목표다.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짐펜트라는 셀트리온의 명운이 걸린 제품이다. 단순 복제약이 아닌 개량 신약으로,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다면 셀트리온은 글로벌 빅파마 반열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AI와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는 앞으로 데이터와 AI를 지배하는 자가 바이오를 지배한다고 강조해왔다. 글로벌 IT 기업과의 협업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단순한 제약회사를 넘어 헬스케어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이다.
■승계 문제와 신뢰 회복의 과제
서정진 회장의 가장 큰 리스크는 역설적으로 승계 문제와 과거 발언과의 정합성이다. 그는 과거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장남 서진석 씨가 셀트리온 의장으로, 차남 서준석 씨가 이사로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이는 ESG 경영 평가에서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2세들의 경영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주들의 불안감도 존재한다. 은퇴 선언 후 2년 만에 경영에 복귀한 것 역시 시스템 경영이 아닌 오너 의존 경영이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합병 완료 후 통합 셀트리온이 서정진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향후 과제다. 그가 없어도 원활하게 운영되는 조직을 만들 때, 비로소 창업자로서의 역할이 완성된다.
■국익과 사익의 경계에서
서정진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바이오 불모지에서 글로벌 기업을 일군 추진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역량이 150조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국가 전체의 성장 동력 발굴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신뢰의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승계 관련 발언 번복으로 손상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자녀에게 자리가 아닌 시스템을 물려주어야 한다. 150조 펀드의 공동위원장으로서 사익이 아닌 국익을 위한 투명한 리더십을 증명해야 한다. 박현주 회장과 함께 국민성장펀드의 양대 축을 맡게 된 서정진 회장. 금융과 바이오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정상에 오른 두 인물의 조합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 주목된다. 서 회장이 이번에는 말이 아닌 결과로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그 행보를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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