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지나서
저마다 어두운 시간을 통과하며, 담담히 삶을 매만지고 지어 올리는 일에 관해 사색하는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
1980년대 파리와 샤를로트 갱스부르. 두 가지 정보만 쥐고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를 보게 된다면 매 순간 예측과 판이한 장면을 마주할 게 뻔하다. 나 역시 당연한 수순처럼 세상 근심과 동떨어진 채 특유의 헝클어진 머리로 유유자적 센강 인근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유의 공기가 그 시절 파리를 메운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가 맡은 엘리자베트는 사고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삶의 굴곡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남편은 새 연인과 떠났고, 양육비를 주지 않는 탓에 단절된 경력을 되살리고자 일자리를 구하려 애쓴다. 살뜰히 꾸린 아파트에는 좌파 성향의 대학생 딸과 학업에 관심 없는 채 시를 쓰는 10대 아들과의 일상이 남았다.
연약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만드는 건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엘리자베트는 시청자의 사연을 연결해주는 전화 교환원 일자리를 얻는다. 1980년대에 아무런 향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 광경을 보면 어쩐지 뭉클해질 것이다. SNS 앱을 켜면 생면부지 사람들의 일상을 넘치게 볼 수 있는 요즘과 달리 어떤 시절에는 모두 같은 시간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소소한 재미였다는 사실이 생경하다. 라디오를 통해 엘리자베트는 거리를 떠도는 소녀 탈룰라를 만나게 되고, 탈룰라는 그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 세 명의 청춘은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고(딸 주디스 역의 메간 노섬, 아들 마티아스 역의 키토 라용-리슈테르, 탈룰라 역의 노에이 아비타 세 배우의 얼굴은 그 자체로 젊음이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삶을 재건하는 법을 하나씩 터득한다. 영화는 극적인 순간을 절제한 채 인물들의 1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담담하게 담는다. 경제 형편이나 성향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상처로 혼자 눈물짓거나 이별의 상황에서도 구석에서 관조하거나 부연 설명을 생략할 뿐이다.
이 모든 설정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건 배우의 힘이다.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종종 자신의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늘 배역의 표면적인 특징만을 떠올렸던 것 같다. 영화 속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통해 그 온전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서른아홉의 그녀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일평생 응축해온 듯 그가 지닌 무한한 야성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에선 50대의 그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를 선보인다. 혼곤하고 한없이 따듯하며 쓸쓸한. 여전히 낯설고 서툰 것 투성이지만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줄 알았던 기대가 무너질 때, 아들의 무심한 짜증 앞에서 그의 섬세한 표정은 이전에 본 듯한 어떤 여자나 엄마의 것과 다르다.
영화 말미, 처음 자신만의 공간을 구한 엘리자베트의 모습과 이혼 직후 라디오 교환원에 지원하게 만든 시가 포개진다. “타인들이 우리 존재를 생각해볼 순간이 있을 것이다/ (중략) 우리는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다 / 우리는 매번 참으로 아름다운 이방인이었고 밤의 여행자들이었다.” 은유적인 시구에서, 빛바랜 듯 그려낸 파리 풍경에서, 인물들의 삶의 시간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결국 서글픈 순간들을 딛고 살아낼 수 있는 건 그저 서로에게 기대고 또 그 순간을 발판 삼아 혼자 일어서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12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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