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랑이 부담스러운 이유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단어, ‘모성애’.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 앞에서 수많은 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엄마의 전화가 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이 빨리는 듯한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딸들은 그 감정을 ‘죄책감’이라는 상자에 구겨 넣기 바빴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들은 사랑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딸의 영혼을 옭아매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둔 딸들에게 엄마의 사랑은 따스한 햇볕이 아니라, 숨 쉴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는 진공 상태와도 같다.
우리는 흔히 학대라고 하면 고성을 지르거나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서적 학대’는 훨씬 은밀하고 고요하게 진행된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피해자인 딸조차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저 자신이 예민하거나 효심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검열할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는 그 무거움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엄마라는 숙주에 묶어두려는 ‘정서적 탯줄’이자, 당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한 ‘기생’에 가깝다.
이제 우리는 그 무거운 사랑의 이면을 들여다보려 한다. 엄마가 왜 그토록 당신에게 집착하고, 통제하려 하며, 죄책감을 심어주는지 그 심리적 기제를 파헤쳐 볼 것이다.
이것은 엄마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부당한 짐을 내려놓기 위함이다.
자아의 확장, 당신은 엄마의 아바타였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딸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아의 확장(Extension of Self)’이라고 부른다.
엄마는 당신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당신은 엄마의 팔이나 다리, 혹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렇기에 엄마는 당신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당신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인다. 딸이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을 얻으면, 엄마는 마치 자신이 해낸 일인 양 우쭐해하며 주변에 자랑을 늘어놓는다.
반대로 딸이 초라한 모습을 보이거나 실수를 하면, 엄마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딸을 비난한다. “네가 나를 망신시켰어”라는 말은 엄마의 내면 심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 아니라, ‘남들에게 비친 당신의(결국은 엄마 자신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엄마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간섭한다.
옷차림부터 친구 관계, 진로 선택, 심지어 배우자 선택에 이르기까지 엄마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때만 사랑을 주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하면 차가운 침묵이나 비난으로 응징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딸은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당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모른 채, 오직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엄마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아바타’로 살아가게 된다.
엄마의 사랑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존재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투영된 ‘엄마 자신’을 향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평생을 바쳐 엄마라는 관객을 위한 연극 무대에 섰지만, 그 무대의 주인공은 단 한 번도 당신이었던 적이 없다.
감정의 쓰레기통, 부모화된 자녀의 비극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또 다른 특징은 경계의 부재다. 엄마는 딸과 자신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딸을 자녀가 아닌 ‘친구’나 ‘배우자’의 위치에 둔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한다. 엄마는 어린 딸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 시댁과의 갈등, 인생의 허무함 등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너희 아빠 때문에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아니?”, “너밖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이런 말들은 딸에게 엄마를 구원하고 위로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지운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자신의 감정은 억누른 채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 어린 시절을 다 보낸다.
엄마가 딸을 친구처럼 대하는 것은 겉보기엔 친밀해 보이지만, 실상은 정서적 학대다. 아이는 어른의 문제를 감당할 정서적 그릇이 되지 못한다.
엄마는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고 미성숙하기 때문에, 딸에게 기생하여 정서적 안정을 찾으려 한다.
엄마는 딸이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을 배신으로 간주한다. 딸이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하면, 엄마는 갑자기 아프다고 하거나 우울증을 호소하며 딸의 발목을 잡는다.
“내가 아픈데 네가 어떻게 나를 두고 갈 수 있어?”라는 무언의 압박은 딸에게 죄책감이라는 족쇄를 채운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란 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 보이면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고, 무리한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학습된 ‘돌봄 제공자’의 역할이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엄마가 당신에게 그토록 많은 하소연을 했던 것은 당신을 신뢰해서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는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칭얼대기 가장 만만한 대상을 찾았을 뿐이다.
시기심, 백설공주 왕비의 거울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진실 중 하나는, 엄마가 딸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모성애라면 자식이 자신보다 더 잘되고,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늙어가는 자신과 달리 날로 피어나는 딸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신은 누려보지 못한 기회들을 질투한다.
이 질투는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딸이 예쁜 옷을 입고 나오면 “그 색깔은 너한테 안 어울려, 너무 뚱뚱해 보여”라고 깎아내리거나, 딸이 성취를 이루면 “운이 좋았네, 너무 자만하지 마”라며 찬물을 끼얹는다.
심지어 딸과 아빠 사이가 좋은 것을 질투하여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기도 하고, 딸의 남자친구나 배우자를 험담하며 관계를 망치려 들기도 한다.
엄마는 딸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을 때, 즉 자신보다 못하고 불행해 보일 때 오히려 안심한다. 딸이 빛나는 순간 엄마의 자존감은 위협받는다.
세상의 주인공은 오직 엄마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딸은 혼란에 빠진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서 성공했는데, 정작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면 엄마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 구속(Double Bind)’ 상황에서 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빛을 감추고, 자신의 재능을 축소하는 법을 배운다. 엄마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것이 바로 딸들의 발목을 잡는 ‘성공 공포’의 실체다.
당신이 행복할 때 엄마가 미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면, 그것은 당신의 착각이 아니다. 엄마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과 결핍이 당신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사된 것이다.
부채감을 내려놓고, 당신의 삶으로 걸어 나가라
이 글을 읽으며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면, 그것은 당신이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진실을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그토록 무겁고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그것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통제’와 ‘착취’와 ‘질투’가 뒤섞인 오염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엄마의 빈 껍데기를 채워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엄마의 불행을 구원해야 할 메시아도 아니다.
엄마가 당신에게 주입했던 “너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은 엄마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이제는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부채감’을 내려놓을 때다. 엄마의 결핍은 엄마의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것이지, 당신이 채워주지 못해서 생긴 구멍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느라 당신의 소중한 생명력을 소진하지 마라.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다. 엄마와 거리를 둬도 괜찮다.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고 당신만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당신이 엄마의 궤도에서 벗어나 당신만의 궤도를 돌기 시작할 때, 비로소 당신의 진짜 삶이 시작될 것이다.
엄마라는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당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당신은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그저 ‘당신 자신’으로 존재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다.
당신의 독립과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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