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내 경제정책 연구모임 '경제는 민주당'은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와 한국 경제의 구조적 과제를 점검했다. 이날 세미나는 민주당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처음으로 공식 교류하는 자리로 내년도 경제 전망과 중장기 정책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사말에서 "그간 민주당이 한국경제인협회와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내년도 경제 전망을 두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해보자는 취지로 자리를 마련했다"며 "평소 생각이 다르더라도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해법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발제에 나선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세계 경제가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성장의 규칙 자체가 바뀌는 구조적 전환기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글로벌 유통 시장 재편, 기술 경쟁력 격차, 양극화 심화를 세계 경제의 3대 리스크로 제시하며 생산성 혁신 없이는 성장 회복이 어렵다고 말했다.
더 자세히 그는 "지금의 글로벌 흐름은 지정학적 갈등, 통상질서 재편, AI 중심의 구조 개편이 맞물리며 저성장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도와 생태계 전환을 통한 근본적인 생산성 혁신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세계 경제 성장률이 2024년 3.3%에서 2025년과 2026년 각각 3.1% 수준으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관세 정책 재편, 글로벌 공급망 병목, 주요국의 재정 부담 확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금리와 환율 변동성도 과거보다 커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통상 질서의 변화 역시 구조적 전환의 한 축으로 제시됐다. 그는 다자 체계를 기반으로 한 WTO 중심 질서가 사실상 작동력을 상실했고, 거래형 양자 협상과 힘에 기반한 질서 재편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제 통상은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길과 힘의 문제"라며 "관세·투자·안보·기술이 한꺼번에 교환되는 국가전략이 필요한 시대"라고 정의했다.
◆ 내년 성장률 1.7% 전망에도 불안...인구 절벽·기업 생태계 흔들
글로벌 환경 변화 속에서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취약성도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정 원장은 한국 경제의 올해 성장률을 1% 수준으로 전망하면서, 내년에는 1.3~2% 범위에서 회복 경로가 열려 있다고 분석했다. 신정부 출범 이후 경기 부양 조치와 한미 관세 협상 진전으로 통상 불확실성이 일부 완화된 점은 긍정적 요인으로 평가됐다.
그는 "금리, 환율, 유가가 시장 기대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1.7% 수준의 완만한 회복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금리 인하가 지연되거나 환율과 유가가 상단에서 유지될 경우 비용 부담과 수요 둔화가 겹치며 성장률이 1.3~1.5%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반대로 대외 여건이 개선될 경우 2% 수준까지 회복할 여지도 남아 있다고 전망했다.
산업별로는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조선, 바이오헬스 산업은 비교적 견조한 흐름이 예상되는 반면, 자동차 산업은 정체 가능성이 있고 철강과 정유 산업은 구조적 어려움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됐다. 기업 경쟁력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그는 "5년 후 한국 기업과 미국·중국 기업 간 경쟁력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응답이 많았다"며 "2030년에는 주력 업종 전반에서 중국 기업 대비 경쟁력이 뒤처질 가능성도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는 잠재성장률 하락과 인구 절벽이 지목됐다. 그는 "노동, 자본, 총요소생산성이 동시에 둔화되고 있다"며 "이는 단순한 저성장을 넘어 경제 규모 자체가 줄어드는 축소 경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경고했다.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 저하도 이어졌다. 신생기업 수는 감소하고 고성장 기업 비중도 줄었으며,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다리 역시 원활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2023년 신생기업 수는 95만6천 개로 전년보다 4만2천 개 줄었고, 2024년에도 박스권에 갇혀 있다"며 "제조업에서 매출과 고용이 3년 평균 10~20% 성장하는 고성장 기업의 수와 비중도 10년 전보다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3년간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931개에 불과한 반면, 중견기업에서 다시 중소기업으로 내려간 기업은 1,147개에 달한다"고 우려하며 "성장 사다리의 붕괴는 기업 차원을 넘어 청년 일자리 구조가 고착화되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유니콘 기업 수 감소 역시 한국 경제의 성장 정체를 보여주는 지표로 언급됐다. 그는 "5년 전 한국은 유니콘 기업 수 기준 세계 5위였지만 현재는 9위로 밀려났고, 전 세계 유니콘 1,523개 가운데 한국 기업은 18개로 1% 수준에 불과하다"며 "같은 기간 미국은 525개, 중국은 116개의 유니콘 기업이 늘어난 반면 한국은 7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 "단기 부양 넘어 성장 구조 재설계해야...재정·통화 역할 분담 시급"
정 원장은 이러한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기 경기 대응을 넘어 성장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장 잠재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재정과 통화정책의 역할 분담이 분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내년도 정부 지출이 728조원 규모로 확대되는 만큼, 재정은 AI와 반도체, 전환 산업 등 미래 성장 기반 강화에 집중하고, 통화정책은 기준금리 2.5%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운영해 금융 환경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과 기업 생태계 역시 변화된 환경에 맞게 재편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그는 첨단 산업 투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산적 금융과 보조금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규모 투자 수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기존 금융 조달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리스크와 수익을 함께 나누는 유연한 자본 조달 구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프로젝트 단위 투자 구조, 투자 전문 회사, 기업형 벤처캐피탈의 외부 자금 유치 확대, 해외 투자 활성화와 부채비율 규제 완화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기업 성장 과정에서 작동하는 규제 방식의 전환 필요성도 제기됐다. 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한 사전 규제는 기업의 스케일업을 제약할 수 있으며, 시장지배력 남용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후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이 기업의 중장기 투자 판단에 핵심적이라고 강조했다.
인구 감소와 잠재성장률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노동 공급 확대와 생산성 제고가 불가피하다는 점도 언급됐다. 그는 AI와 로봇 등 스마트 기술을 활용해 노동 생산성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인구 절벽의 충격을 흡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청년·여성·고령층이 모두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와 기술을 정비해 '누구도 낭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실패에 관대한 문화 조성과 실전형 AI 교육 인프라 구축을 통해 기업가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규제 완화 논의 속 대기업 책임 강화 주문...민주당 의원들 "구체적 개편안 필요"
이 같은 문제 제기 이후 이어진 민주당 의원들의 질의에서는 인구 구조 변화와 성장 둔화 국면에서 기업과 자본, 규제 체계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오기형 의원은 재계가 요구하는 규제 완화 논의와 함께 책임 구조에 대한 논의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계가 사후 규제를 언급해 온 만큼, 집단소송이나 징벌적 손해배상, 디스커버리 제도 등 민사적 책임 강화에 대한 논의 역시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형사처벌에 대한 부담을 완화하려면 민사 영역에서 책임과 배상이 보다 명확해지는 제도적 틀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유동수 의원도 규제 개편 논의의 구체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규제 완화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반복돼 왔지만, 실제로 어떤 규제를 어떻게 조정하자는 것인지에 대한 제안은 부족했다"며 "통계나 총론을 넘어 실현 가능한 '10대 규제 완화안' 정도는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은 집권 여당인 만큼, 이 자리에서 공감대가 형성될 경우 당론과 입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규제 개편을 논의한다면 왜 해당 규제를 조정해야 하는지까지 포함한 구체적인 정책 패키지가 제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 의원은 또 인구 구조 변화와 부동산 문제를 함께 언급하며 "인구 감소가 산업 전반은 물론 부동산 시장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연구와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며 "이 같은 인식 전환이 이뤄져야 가계 자산이 부동산 중심에서 생산적 금융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철 원장은 한국경제인협회가 한국 경제 전반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정책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규제 완화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안이 있다"며 "의원들이 요구한 수준에 맞춰 10대 규제 정도로 정리해 다시 설명드리겠다"고 밝혔다. 사후 규제 강화와 민사 책임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해 별도로 제시하겠다"며 추가 논의를 이어갈 뜻을 나타냈다.
[폴리뉴스 권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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