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배분철 기자] 2025년 12월 16일,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본사 수펙스홀. 취임 후 첫 타운홀 미팅에 나선 정재헌 신임 사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선언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CEO의 C를 'Change'로 바꿉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변화관리 최고책임자(Change Executive Officer)'입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통신 공룡 SK텔레콤이 직면한 정체기를 돌파하겠다는 선전포고이자, 스스로 혁신의 최전선에 서겠다는 출사표였다. 정재헌 CEO가 그리는 SKT의 미래는 명확하다. 통신이라는 단단한 대지 위에 AI라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 기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이다.
■'활동적 타성'과의 결별
정 사장의 취임 일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에 대한 경계다. 활동적 타성이란 성공한 기업이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매몰되어 환경 변화에 둔감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정작 변화하지는 않는 상태. 정 사장은 이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며 단순히 열심히만 하는 것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을 '최고경영자(Chief)'가 아닌 '변화관리자(Change Executive)'로 정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권위적인 관리자 역할에서 벗어나, 조직 전체의 타성을 깨부수고 움직이게 만드는 '트리거(Trigger)'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의지다. 급변하는 AI 시대에 통신사가 가진 무거움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이 그 배경이다.
■투 트랙 전략, 통신은 '단단하게', AI는 '빠르게'
정재헌 호(號)의 사업 전략은 '이원화'로 요약된다. 본업인 MNO(이동통신)와 미래 먹거리인 AI에 각기 다른 속도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통신 사업에 대해 그는 "고객이 곧 업의 본질"이라며 '기본'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품질, 보안, 안전 등 통신의 본원적 경쟁력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통신업계 전반에 요구되는 신뢰 회복과 직결되는 메시지다. 통신이 흔들리면 AI라는 미래도 없다는 판단 아래, MNO를 '단단한 지지기반'으로 재구축하겠다는 복안이 읽힌다. 반면 AI 사업에서는 '속도전'과 '선택과 집중'을 주문했다. 글로벌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모든 것을 다 하려다가는 도태될 수 있다는 냉철한 판단이다. 그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며 AI 데이터센터와 고부가가치 솔루션, 독자 AI 모델 고도화를 핵심 과제로 꼽았다. 문어발식 확장이 아닌, 확실한 수익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겠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경영 지표의 대전환, EBITDA에서 ROIC로
정 사장의 경영 스타일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핵심 관리지표의 변경이다. 그는 기존 통신업계가 중시하던 EBITDA(상각 전 영업이익) 대신 ROIC(투하자본이익률)를 새로운 나침반으로 제시했다. 이 변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EBITDA가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얼마나 현금을 벌어들였는지를 보여주는 '규모'의 지표라면, ROIC는 투입한 자본 대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익을 냈는지를 따지는 '효율'과 '질'의 지표다. 통신업은 전통적으로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수적이기에 현금 창출력을 중시해왔다. 정 CEO는 이 공식을 과감히 뒤집었다. 덩치만 키우는 외형 성장을 멈추고, 돈을 얼마나 똑똑하게 썼는지를 따지는 '실질 생산성'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고금리·저성장 시대에 SKT를 '알짜 회사'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자, SKT를 단순한 통신 인프라 기업이 아닌 투자 효율을 극대화하는 'AI 테크 기업'으로 재평가받게 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이기도 하다.
■조직문화, '역동적 안정성'과 드림팀
정 사장은 조직문화의 지향점으로 '역동적 안정성(Dynamic Stability)'을 제시했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단어의 조합에는 정교한 리더십 철학이 담겨 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경영진이 질 테니, 구성원은 마음껏 도전하라."
그가 말하는 '안정성'은 회사가 제공하는 '심리적 안전지대'다. 회사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혁신을 요구하면서도 실패에 대해 가혹한 책임을 묻는 기존 한국 기업문화의 병폐를 정확히 짚어낸 처방이다. 그는 이를 실현할 조직을 '드림팀'이라 명명하며, 진취적 역량과 단단한 내면을 갖춘 인재 육성을 강조했다.
■리더십의 본질, 청송지본의 자세
이날 타운홀의 백미는 정 사장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구절을 인용한 순간이었다. '청송지본 재어성의(聽訟之本 在於誠意)', 송사를 듣는 근본은 성의를 다해 듣는 데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강점을 '낯설게 보기'와 '경청'이라고 소개했다. 내부 출신이 가질 수 있는 편견을 배제하고, 구성원과 시장의 목소리를 성의를 다해 듣겠다는 다짐이다.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공감과 소통을 통해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서번트 리더십'의 발로다.
정재헌 CEO는 취임 첫날, 화려한 비전 선포식 대신 '변화'와 '책임' 그리고 '경청'을 이야기했다. MNO라는 거함을 단단히 수리하고, 그 위에 AI라는 쾌속정을 띄우려는 그의 전략이 ROIC라는 정교한 나침반을 통해 어디로 향할지. "책임은 내가 진다"는 그의 리더십이 구성원들의 '활동적 타성'을 깨고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 재계의 시선이 '변화관리자' 정재헌에게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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