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영국이 2년여에 걸친 협상 끝에 자유무역협정(FTA) 개선 협상을 최종 타결하며 양국 경제협력의 외연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관세 인하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AI) 확산이라는 통상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질적 업그레이드'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다. 자동차, K-푸드, K-뷰티 등 주력 수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서비스·디지털·신기술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넓혀 중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개선 협상의 핵심은 자동차다. 한국의 대영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는 기존 FTA 체제에서 무관세 혜택을 받기 위해 높은 원산지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 당사국 내에서 발생한 부가가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했는데, 이 기준이 대폭 완화되면서 한국 자동차 업계의 숨통이 트이게 됐다. 특히 전기차의 경우 배터리 원재료 가격 변동에 따라 원산지 충족 여부가 달라지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지만, 이번 개선으로 관세 혜택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업계에서는 대영 수출 경쟁력 회복은 물론, 유럽 시장 전반으로의 파급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K-푸드와 K-뷰티 등 소비재 분야도 수혜 대상이다. 가공식품과 화장품 등은 원재료 조달 구조가 글로벌화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원산지 요건이 까다로워 FTA 효과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이번 협상으로 생산 공정 중심의 기준이 도입되면서, 국내에서 실질적인 제조·가공이 이뤄진 제품이라면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한류 확산과 맞물려 영국 내 한국 식품·화장품 수요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 강화는 시장 확대의 결정적 계기가 될 전망이다.
정부조달과 인프라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영국은 고속철도 시장을 추가로 개방하기로 하면서, 그동안 불균형적으로 운영돼 왔던 시장 접근 구조가 개선됐다. 이는 철도, 신호, 차량, 유지·보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 기업의 진출 기회를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단발성 수출을 넘어 장기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서 산업적 파급 효과도 적지 않다.
서비스와 신산업 분야의 개방 역시 주목된다. 온라인 게임을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영역에서 한국 기업의 진출 여건이 개선됐고, AI 등 신기술 기반 서비스에 대한 협력 틀도 마련됐다. 데이터 이전의 자유 보장, 현지화 요구 금지, 소스코드 제출 요구 제한 등 디지털 규범이 대폭 반영되면서, 국내 IT·플랫폼 기업들이 제도적 불확실성 없이 영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비자 제도 정비는 기업 현장에서 체감도가 높은 성과로 꼽힌다. 제조 공장 설립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엔지니어와 전문 인력의 영국 입국 절차가 간소화됐고, 영어 능력 요건이 완화된 비자 활용이 가능해졌다. 본사 인력뿐 아니라 협력업체 인력까지 서비스 계약을 통해 파견할 수 있도록 한 점은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기업들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오와 IT 분야 전문 인력의 체류 요건 완화 역시 인재 교류 확대를 뒷받침한다.
공급망 협력도 제도화됐다. 희토류, 배터리, 요소수 등 핵심 원자재 수급 불안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양국은 공급망 교란 시 신속 대응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긴급 상황 발생 시 지정된 핫라인을 통해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고, 대체 공급처 모색과 수출 협력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기 위기 대응뿐 아니라 중장기 산업 안정성 확보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여기에 '한·영 혁신위원회' 신설을 통해 AI, 자율주행차, 생명공학, 첨단 제조 등 미래 기술 분야 협력도 정례화한다. 연구개발 협력과 투자 확대, 정책 공조를 통해 양국이 기술 파트너로서 관계를 심화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이번 한·영 FTA 개선 협상은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는 글로벌 통상 환경 속에서 자유무역의 실질적 가치를 재확인한 사례로 평가된다. 관세 혜택 확대라는 즉각적 성과와 함께, 디지털·신기술·공급망 협력을 포괄하는 구조로 진화했다는 점에서 '체질 개선형 FTA'라는 의미를 갖는다. 향후 법률 검토와 국회 비준을 거쳐 협정이 발효되면, 한국 기업들의 영국 및 유럽 시장 공략은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