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방어권'으로 시작한 내홍 속 진정 처리·권고율 급락…공석 충원 필요성 지적도
(서울=연합뉴스) 조현영 기자 = '인권의 최후 보루'를 자처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올 한해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활동이 부진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14일 인권위가 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인권위는 올해 1월 1일부터 이달 8일까지 총 1만54건의 진정 사건 중 8천814건을 처리하며 처리율이 87.7%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102.2%, 2023년 112.5%, 2022년 97.4%와 비교해 눈에 띄게 낮아진 수치다. 진정이 해를 넘기는 경우도 있어 인권위는 그간 접수한 것보다 더 많은 진정을 처리해왔으나, 올해는 이런 추이가 깨졌다.
처리율 급락의 원인은 인권위 내부 운영 체계의 악화로 지목된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담당하는 침해구제 제1·2위원회(1·2소위)는 지난 12일까지 각각 8회, 10회 열렸는데, 2021년부터 매년 10번 이상 열린 것과 비교해 현저히 드문 빈도다.
두 소위의 처리 건수도 급감했다. 지난 3년간 매년 1천건 이상을 처리해온 1소위는 8일 기준 753건을 처리해 작년(1천183건)의 63% 수준에 그쳤다.
'권고' 조치율도 급락했다. 1·2소위의 권고율은 각각 1∼2%대로, 전체 6개 소위의 평균 5%를 하회했다. 권고는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피해자에 구체적 구제 방안을 제시하는 결정으로,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의 핵심 역할을 한다.
인권위는 올해 초부터 정치적 갈등에 크게 흔들렸다. 1월 13일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방어권 보장 안건은 야당 의원들과 인권 활동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안건은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인권위에 난입해 아수라장이 된 초유의 사태 끝에 2월 10일 의결됐다. 이 과정에서 공동발의자 김종민(법명 원명) 비상임위원이 자진사퇴하고, 김용원 상임위원이 탄핵 인용시 헌법재판소를 '부숴 없애야 한다'는 SNS 글을 올려 논란이 확산했다.
이후 국민의힘이 극우 논란이 있는 인사를 인권위원 후보로 추천했으나 더불어민주당 등의 반대로 제때 충원에 실패했다. 여야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며 인권위는 인력 공백 속에 아슬아슬하게 운영돼 왔다.
내홍은 일부 위원이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간리)에 인권위 등급을 강등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내며 극한으로 치달았다. 간리 평가에서는 종합적 검토 결과 'A등급'이 유지됐다. 다만 직원 40명 이상과 인권 연구자, 인권 단체들은 '인권위 정상화'를 요구하며 성명을 내고 집회를 벌이고 있다.
연구자 734명의 성명을 주도한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연합뉴스에 "인권위가 방향을 잡고 열심히 해도 진정 처리가 밀리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처리 지연이 당연한 결과"라며 "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인권과 관련된 정부의 모든 기능이 작동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반면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상임위원 한 명이 계속 공백이라 지체가 심화하고 있다"며 "검찰이 무조건 기소한다 해서 잘 하는 게 아닐뿐더러 기소율로 그 성과를 평가하지 않고, 법원도 판단의 적정성이 중요하듯 인권위 결정도 권고율보다 결정의 적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교내 휴대전화 제한에 관한 결정을 내렸는데, 최근 호주에서 같은 취지의 전면적 제한 정책이 나온 것처럼 시대 흐름에 맞는 판단과 내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백에 따른 업무 차질을 개선하려면 우선적으로 공석을 메우는 데 국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울러 전문가들과 정치권에선 제도적 개선의 필요성도 언급한다. 상임위원 충원 기한과 소위원회 개최 빈도를 법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인권위 전 고위관계자는 "진정 처리가 밀리지 않도록 소위원회를 2∼3주에 한 번은 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장식 의원은 "인권위는 사실상 마비 상태"라며 "인권위 정상화를 위한 법안을 중심으로 국회가 조속히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hyun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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