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시작한 사랑이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고작 두 달이었다. 혹은 세 달. 3년을 만난 연인과 헤어졌을 때도 밥은 넘어갔고 잠은 잤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짧게 스치고 지나간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은 지금 숨을 쉬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위로 대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시간의 길이로만 따지면 이것은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신의 심장은 그것을 ‘생애 가장 강렬했던 사랑’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깊이가 시간과 비례한다고 믿는다. 오래 만날수록 정이 들고, 헤어지기 힘들 것이라는 통념이다. 이것은 틀렸다. 이별의 고통을 결정하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기대치의 낙차’다.
급하게 시작한 사랑은 브레이크 없는 스포츠카와 같다. 서로를 탐색하고 검증해야 할 ‘안전거리’를 무시한 채, 엑셀을 끝까지 밟아버린 관계다.
속도가 빠를수록 풍경은 흐릿해지고 오직 조수석에 앉은 상대방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 질주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그 속도감이 주는 도취. 그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이다.
짧은 연애가 남기는 상처가 유독 뼈아픈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관계의 상실’이 아니라 ‘환상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통째로 압류당한 것이다. 이 글은 그 박탈감의 정체를 해부하는 보고서다.
뇌는 ‘예측하지 못한 보상’에 미친다
왜 우리는 금방 사랑에 빠지고, 그토록 빨리 서로에게 중독되는가. 낭만적인 이유를 찾고 싶겠지만, 진실은 훨씬 건조하고 생물학적이다. 우리 뇌는 ‘예측 가능한 보상’보다 ‘예측하지 못한 보상’에 훨씬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오래된 연인 사이를 생각해보자. 그가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올 것을 당신은 안다. 주말에 만나서 무엇을 먹을지, 밥을 먹고 나면 어떤 표정으로 커피를 마실지 예측 가능하다. 편안함과 안정감은 있지만, 뇌를 뒤흔드는 자극은 없다. 도파민은 예측과 결과가 일치할 때 분비되지 않는다.
반면 급하게 시작된 관계는 모든 것이 불확실성 투성이다. 그가 언제 연락할지, 오늘 밤 무슨 말을 할지, 우리가 사귀게 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이 불확실성은 뇌의 보상 중추인 복측 피개 영역(VTA)을 폭격한다.
이때 상대방이 던지는 다정한 문자 하나, 갑작스러운 고백은 뇌 입장에서 ‘로또 당첨’과 같은 충격을 준다. 예측하지 못했던 거대한 보상이 주어질 때, 도파민 수치는 기준치를 훨씬 웃돌며 폭발한다. 우리는 이 화학적 폭발을 ‘운명’이라고 착각한다.
문제는 이 도파민의 낙차다. 급하게 타오른 관계일수록, 도파민 수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나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는다. 뇌는 순식간에 이 높은 수치에 적응해버린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고양감을 ‘정상 상태’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별은 이 공급을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끊어버린다.
천천히 식어가는 관계는 뇌가 적응할 시간을 준다. “아, 이제 예전 같지 않구나”라고 느끼며 도파민 수용체가 서서히 줄어든다. 하지만 급한 이별은 100km로 달리던 차가 벽에 정면충돌하는 것과 같다. 뇌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어제까지 공급되던 그 막대한 양의 행복 호르몬이 왜 갑자기 들어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겪는 고통은 엄살이 아니다. 마약 중독자가 약을 끊었을 때 겪는 금단 현상과 생리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고, 그 사람 생각만 하면 가슴이 조여오는 증상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뇌의 병이다. 짧고 굵게 만났다는 건, 그만큼 짧은 시간 동안 치사량에 가까운 감정의 마약을 들이부었다는 뜻이다. 후유증이 큰 것은 당연하다.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는 유령이 된다
심리학에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의 뇌는 완결된 일보다 도중에 중단된 일을 훨씬 더 잘 기억한다는 이론이다. 식당 웨이터는 계산을 마친 테이블의 주문 내역은 잊어버리지만, 아직 서빙 중인 테이블의 복잡한 주문은 또렷이 기억한다. 뇌는 ‘끝나지 않은 과제’를 닫지 못한 윈도우 창처럼 계속 띄워놓고 에너지를 쏟는다.
급하게 시작해서 급하게 끝난 연애는 뇌 입장에서 ‘미완성 과제’다.
오래 사귄 연인들은 서로의 밑바닥을 본다. 싸울 만큼 싸워봤고, 실망할 만큼 실망했다. 그들의 이별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것과 같다. 내용은 슬플지언정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여기까지야”라는 납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썸을 타다 끝났거나 연애 초기에 끝난 관계는 다르다. 서로의 단점을 파악하기도 전에, 권태기가 오기도 전에, 가장 좋았던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필름이 끊겨버린 셈이다. 이야기가 결말 없이 중간에 찢겨나갔다.
당신의 뇌는 이 열린 결말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이야기를 완결 짓기 위해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때 내가 화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결혼까지 갔을까?” “우리가 가기로 했던 그 여름 휴가는 어땠을까?”
이것은 ‘가능성의 상실’이다. 당신은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을 때 펼쳐질 수 있었던 수만 가지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짧은 만남 동안 당신은 상대방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만 보았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이상화(Idealization)’라고 한다. 당신은 그를 사랑한 게 아니다. 당신의 결핍을 채워줄 구원자로 그를 조각하고, 그 조각상을 사랑했다.
현실의 연애는 지루하고 구질구질하다.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고, 밥 먹을 때 쩝쩝 소리를 내며, 기념일을 잊어버린다. 긴 연애는 이런 현실의 데이터가 쌓여 환상을 부순다. 하지만 짧은 연애는 환상이 깨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완벽했던 사람’으로 박제된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이기기 힘든 것처럼, 현실의 똥차는 기억 속의 벤츠를 이길 수 없다.
당신이 그토록 그를 잊지 못하는 건,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당신이 그를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해결된 과제에 집착하는 뇌의 본능이 당신을 밤새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상처는 속도위반 고지서다
우리는 효율성의 시대를 산다. 배송도, 일처리도, 심지어 밥을 먹는 것도 빨라야 미덕인 세상이다. 연애 앱을 켜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면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다. 감정의 교류마저 가성비를 따지고, 썸이라는 이름으로 간을 보다가 빠르게 본론으로 진입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만큼은 이 효율성의 법칙을 비웃는다. 사랑은 전자레인지에 3분 돌려서 완성되는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다. 뜸을 들이고, 불을 조절하며 천천히 익혀야 하는 솥밥에 가깝다.
급하게 시작한 사랑이 남긴 상처가 유독 쓰라린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생략된 과정’의 청구서를 내밀기 때문이다. 상대를 알아가는 조심스러움, 신뢰를 쌓아가는 지루함,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조율하는 피로함. 이 모든 필수적인 과정을 건너뛴 대가는 혹독하다. 연체된 이자가 붙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아픔을 인정하라. 하지만 그것을 ‘그 사람이 내 운명이었다’는 증거로 삼지는 마라. 그것은 단지 당신의 뇌가 급격한 화학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일 뿐이다.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지독한 멀미다.
이 상처가 아물고 나면 흉터가 남을 것이다. 그 흉터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흉터는 당신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길 것이다. 다음번에 누군가 당신의 인생에 불쑥 들어와 엑셀을 밟으려 할 때, 브레이크를 밟을 용기를.
진짜 사랑은 속도계의 바늘을 꺾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선 차 안에서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지루하고도 평온한 시간 속에 있음을, 그때는 알게 될 것이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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