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밤, 서울 한복판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 밤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군 내부의 무장 충돌이 현실로 표면화된 순간이었다. 이후 사법 판단과 역사 기록은 이를 ‘이른바 12·12 군사반란’으로 명시해 다룬다. 군의 지휘계통이 흔들린 틈을 타, 하나회 등 사적 결사·인맥 네트워크가 공적 통수체계를 잠식했고, 국가는 그날 밤부터 ‘헌법의 질서’가 아니라 ‘실력의 질서’에 빨려 들어갔다.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보여준 것은 '국가안보'가 아니라 국가 무력의 사유화였다. 군이 국민을 지키는 조직인지, 특정 집단의 권력 장치인지가 뒤섞이는 순간, 국익은 가장 먼저 훼손된다. 국익은 국경 밖의 적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국가가 스스로 정한 통제 원칙을 무력으로 깨는 순간, 그 자체가 가장 큰 국가 리스크가 된다.
45년 뒤, 2024년 12월 3일 밤에도 대한민국은 비상계엄이라는 단어 앞에 섰다. 다만 이번에는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총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곧 '위험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실시간으로 전국민은 국회 출입이 통제되고, 계엄군의 진입이 시작되는 장면을 목도했다. 이후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의결했고, 대통령의 계엄 해제가 뒤따랐다는 사실관계는 법령 개정 문서의 ‘개정이유’에도 정리돼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누가 어느 학교 출신이냐'가 아니라, 군이 정치의 도구로 호출되는 구조 자체다. 12·12는 사적 네트워크가 군을 장악해 총구를 안으로 돌린 사건으로 법·역사적으로 정리돼 있다. 12·3은 그 성격과 책임의 범위가 수사·재판 등 제도적 절차를 통해 확정돼야 할 영역이 남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날 밤 역시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헌법 원칙이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헌법 제5조는 국군의 존재 이유를 단정적으로 규정한다.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를 사명으로 하며,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12·12는 그 문장을 노골적으로 배반했다. 12·3은 그 문장을 정면에서 시험대에 올렸다. 그래서 두 사건을 함께 놓고 보면, 결론은 하나로 수렴한다. 군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헌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법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국민주권의 작동 원리다.
국익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국익은 ‘질서’라는 이름으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부터 훼손되기 시작한다. 군이 정치의 주체로 호명될수록 국가는 불안정해지고, 신뢰는 가장 먼저 무너진다. 반대로 군이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있을 때, 비로소 국가의 신뢰와 동맹의 신뢰, 시장의 신뢰가 함께 유지된다.
이 사실은 12·3 비상계엄 사태 불과 수개월 전 열린 국군의날 시가행진에서도 드러났다. 정치적 구호가 아닌 헌법에 규정된 임무에 충실한 군의 모습에 시민들이 환호를 보낸 이유는 분명하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과시된 힘이 아니라, 헌법에 의해 통제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12·12와 12·3은 방식이 달랐다. 하나의 밤에는 총성이 울렸고, 다른 밤에는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건이 남긴 경고는 같다. 국가의 군사력이 사적 권력의 계산에 포섭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영웅담이 아니라 교훈이다. 군 내부의 사적 결사·사적 충성의 유혹이 다시는 국가의 결정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감시를 촘촘히 세우는 일. 그 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어느 정권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국익이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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