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6개월이 넘어가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이 한미관계에 너무 집중돼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해 언급한 '엔드(END) 이니셔티브'에 대해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의 느낌이 든다는 평가가 나왔다.
12일 동북아평화공존포럼(대표의원 정동영)과 시민평화포럼이 '통일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관계론'을 주제로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이재명 정부는 한미관계에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관계를 잘해야 남북관계가 뚫린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만 하면 너무 밀려버려서 (지난 8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이 자임했던) '페이스메이커' 역할도 못하게 된다"며 "대통령이 좀 교통정리 좀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한미동맹 강화보다는 남북관계 개선에 보다 주안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이태호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밝힌 'END이니셔티브'에 대해 "쌀로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야 잘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라며 "이걸 상대가 보면 '왜 저런 걸 말해서 속을 긁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정인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같은 느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23일(현지시간) 취임 이후 첫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즉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 대화로 한반도에서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END)하고, '평화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며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이를 두고 북한 비핵화보다 교류나 관계정상화를 우선에 두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는데, 이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세 요소는 우선순위나 선후관계가 없다. 각각 하나의 과정이며 상호 추동하는 구조를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혀 비핵화가 앞으로 나설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위 실장의 언급대로 세 요소에 순서가 없는 것이 정확하다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과 비슷한 구상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2008년 당시와는 달리 북한이 실질적으로는 핵을 보유한 상태가 됐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비핵화를 앞세운다면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김병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은 "END 이니셔티브의 세 요소가 다 중요한데 관계정상화는 남북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 북한 간의 관계정상화를 지원 하겠다는 것"이라며 "여기에는 북미, 북일관계 정상화가 핵심이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를 열어가고자 하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내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중이 정세의 분수령이 되는 관건적 시기"라며 "그 계기에 북미 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날 토론회에서 발표를 맡은 고유환 전 통일연구원장은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 하겠지만 김정은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트라우마가 있다"라며 "두 국가론에 맞는 미국의 평화 구상이 나와야 움직일 것이다"라고 밝혀 북미 수교 등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들이 있어야 북한이 미국과 정상회담에 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정인 교수 역시 "미국이 북에 줄 수 있는 것은 북미 수교와 불가침 약속 그리고 제재 완화 정도가 있고, 북은 핵 동결과 감축이 있는데, 이를 어느 정도까지 할 것이고 어떻게 점검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는 "백악관에 북한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라면서 실무 차원에서 미국 정부가 북미 간 협상을 책임지고 끌고 갈 상황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문 교수는 "(최근에) 유럽에 가서 북측 관계자를 만나보니 결국 따로 가자는 것이다. 남북이 다른 국가니까 상대방의 영토와 주권 존중하고 내정에 불간섭하는 국제법에 따르자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문 교수는 남한에서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중단하는 정도로는 북한이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면서, 적대적 두 국가에 대한 해법으로 헌법 제3조와 4조를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로 돼 있는데, '두 국가'를 선언한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이 이 부분을 정리하지 않으면 대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고유환 전 원장은 "영토조항을 개정할 경우 북한 유사시 관할권을 주장하기 어렵고, 북한이탈주민의 법적 지위 인정 등에 문제가 생기는 등 개헌과 관련한 남남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며 "현행 영토규정에 단서조항을 마련하는 등 묘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태호 위원장도 "(3,4조를 바꾸는) 개헌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단서조항을 두는 것은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남북관계 개선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외통수에 걸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토론회에 자리한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는 "(영토조항인) 기존 헌법 3조에 '실효적 관할구역으로 한다'를 추가하는 것 정도의 변경은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보인다"라며 전면적 개정이 아닌 부분적 변경은 가능할 것으로 봤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정철 서울대학교 교수는 "3,4조의 자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라며 "4조가 먼저 나오면 평화통일 문제가 영토 사안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고유환 전 원장은 북한이 남한의 헌법 개정을 주목하게 된 배경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계속 헌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윤 정부가 헌법 제3조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을 본 북한 입장에서는 '우리를 흡수통일 하겠다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적대적 두 국가를 천명한 북한이 내년 초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9차 당 대회에서 영토규정을 새로 만들지는 미지수다. 고 전 원장은 "육상은 MDL(군사분계선)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하면 되는데 서해의 경우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사령관이 1953년 8월 30일 설정한 북방한계선(NLL)이 있고 북한은 자기들이 그린 경비계선이 있는데 이 부분이 중첩된다"며 "영토 규정을 명확히 하면 주권에 해당되는 것이라서 이 부분에 대해 북한도 고민이 많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헌법에 담는다고 해서 그것이 불변의 가치로 남는 것은 아니다"라며 "정치적 영역"에서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운전자냐, 중재자냐'라는 논쟁을 벌일 당시에도, 양면적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 하나만 옳다고 단정하는 용어 논쟁 자체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만큼 '평화적 두 국가론'은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통일 지향'을 분명히 함으로써 현재의 논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인사말에서 "이재명 정부의 선제적인 적대성 제거 조치에 뒤이어 남북 간 내재된 상호 적대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전쟁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구축을 위한 제도화 논의로 나아가야 할 단계"라고 현 상황을 진단하고 "오늘 평화적 두 국가관계론 논의가 평화적 통일이 종점이 되는 고속도로의 진입로가 될 수 있는 공론장이 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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