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김종효 기자 | 전 세계적으로 AI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인프라·알고리즘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소버린(Sovereign) AI’ 논의가 한층 뜨거워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과 지정학 리스크가 커지면서 데이터 주권, 기술 종속 회피, 사이버 안보 등이 정치·경제 전략 의제가 된 것이다.
최근 델 테크놀로지스가 IDC에 의뢰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6개국(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정부 주도 AI 전략과 소버린 AI 도입 현황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실시해 발표한 ‘선도적인 소버린 AI 국가 실현’ 보고서에선 한국 정부 기관이 AI를 경제 성장의 핵심 전략 요소로 인식하고 있으며 생성형 AI 투자 의향이 아태 지역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 기관의 범용 AI 투자 의향은 60%, 생성형 AI 투자 의향은 67%로 아태 지역 평균을 크게 웃돈다. 이미 아태 지역 정부 기관 46%가 AI 활용 또는 시험 단계에 들어선 상황에서 한국은 그중에서도 ‘투자 속도가 빠른 국가’에 속한다. 또한 국내 정부 기관 절반(50%)은 2026년까지 새로운 생성형 AI 프로젝트에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버린 AI 도입률만 놓고 보면 2024년 한국의 도입 수준은 27%로 아태 평균(33%)보다 낮다. 이 격차는 2026년까지 빠르게 좁혀질 전망이다. 응답 기관은 향후 2년 내 소버린 AI 도입을 두 배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는 한국이 소버린 AI를 ‘선택적이고 점진적인 전략’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진단과 맞닿는다. 즉 모든 AI 인프라를 국산화하거나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 우선 적용하며 필요 분야에 신중하게 확대하는 ‘선택적 소버린 AI’ 접근이다.
다만 정부 기관이 소버린 AI 도입을 주저하는 핵심 요인은 명확했다. 비용(50%)이 가장 컸고 기존·향후 시스템과의 상호 운용성 문제(47%)가 뒤를 이었다.
GPU 중심의 고성능 연산 자원, 데이터 센터 확충, 전력·냉각 인프라 등 물리적 기반에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고서에서도 “초기 구축 비용과 인력 역량 확보 비용이 가장 큰 제약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소버린 AI는 기본적으로 데이터센터·고성능 컴퓨팅(HPC)·전용 네트워크·보안 체계 등 국가급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각 부처가 통합 전략 없이 개별적으로 AI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이후 국가 차원의 소버린 AI 프레임워크와 연계·통합하는 과정에서 복잡성과 비효율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통합된 국가 아키텍처를 설계하기 어려운 점도 현장에서 현실적 난관으로 꼽힌다.
인력 문제 역시 중요하게 등장했다. 소버린 AI 구현에는 개발 인력뿐 아니라 데이터 거버넌스·AI 윤리·보안·클라우드 아키텍처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한국이 빠르게 AI를 수용하고 있음에도 전문 인력 부족으로 생태계 성숙 속도가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정부 기관이 소버린 AI를 실제 적용할 사용 사례로 꼽은 항목도 인상적이다. 지속가능성 관련 AI가 45.7%로 가장 높았으며 IT 운영 자동화(41.9%), 소프트웨어 개발 및 테스트(40.5%), 정책·예산 시뮬레이션(40%), 사기 방지 및 감사(39.5%)가 뒤를 이었다.
에너지 관리·환경 모니터링·탄소 감축 정책 등 지속가능성 영역에서 소버린 AI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정부가 디지털 전환과 ESG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흐름과도 일치한다. 국가 차원의 전략 목표와 직접 연결돼 있어 생성형 AI를 포함한 소버린 AI가 단순 업무 자동화를 넘어 정책 설계·감독 기능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의미다.
개발자 환경 개선과 관련된 도구와 프레임워크 수요도 높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공공기관이 안정적인 데이터 거버넌스와 국산 인프라 기반에서 개발·테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해외 클라우드 의존도를 낮추고자 하는 공공 부문의 기술 전략과도 연결된다.
국내 기관 53%는 소버린 AI 성공을 위한 최우선 조건으로 ‘윤리적 지침과 투명성을 우선시하는 AI 도구’를 꼽았다. 이는 최근 공공 AI 프로젝트에서 강조되는 신뢰성·검증 가능성·책임성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 뒤를 ‘국가 AI 이니셔티브에 전념하는 현지 인력 보유 공급업체’(40%), ‘데이터 주권을 보장하는 국내 클라우드 인프라’(37%)가 이었다.
업계에선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성하기 위해 국가·기업·스타트업·인프라 업체·솔루션 기업이 모두 참여하는 다층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규제 컴플라이언스를 충족하는 소버린 AI 프레임워크, 클라우드 생태계와의 파트너십, AI 전문 인력 확보가 한국에서 우선 과제로 지적된다.
델 테크놀로지스는 한국을 포함한 아태 지역 국가들이 탄력성 있고 성공적인 소버린 AI 로드맵을 구축하기 위한 7가지 단계를 제시했다. ▲소버린 AI 역량 및 리더십 구축 ▲균형 잡힌 소버린 AI 접근 방식 채택 ▲국가 소버린 AI 생태계에 다양성 구축 ▲국가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용 사례에 초점을 둔 접근 ▲데이터 거버넌스 및 상호 운용성의 취약점 해결 ▲정책 및 규제 프레임워크에 맞춘 소버린 AI ▲유능한 파트너로 구성된 국가 소버린 AI 생태계 구축 등이다.
또한 ‘데이터 준비성(data readiness)’을 모든 단계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레거시 시스템 현대화, 데이터 아키텍처 정비, 표준화된 메타데이터 구축 없이는 소버린 AI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은 AI에 대한 투자 열의와 정책적 관심은 매우 높지만 비용·인력·상호운용성 문제로 인해 ‘전면적 소버린 AI’ 접근보다는 필요한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경로를 택하고 있다. 방산·재난안전·사회보장 등 국가적 민감도가 높은 분야에서 소버린 AI 인프라를 우선 적용하고 민간과의 협업을 통해 비용 부담을 줄이고 기술 공급 생태계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다만 글로벌 AI 패권 경쟁이 ‘주권형 AI 인프라’ 경쟁으로 빠르게 옮겨가는 만큼 한국이 소버린 AI 투자를 계획대로 두 배로 늘리고 생태계·규범·인재 측면에서 구체적 실행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떠오른다.
김경진 델 테크놀로지스 한국총괄 사장은 “소버린 AI는 안보와 혁신을 보장하면서 각국 고유의 가치를 구현하는 기반”이라며 “혁신 기업·인프라 공급업체·개발자·기술 공급업체를 포함한 생태계를 확보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업계 전문가는 “AI 경쟁이 기술 기업 중심에서 국가 단위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소버린 AI는 한국의 디지털 전략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으로 떠올랐다”며 “한국은 빠른 AI 확산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비용과 인력이라는 현실적 제약을 고려해 ‘선택적·단계적 소버린 AI’를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2년은 공공 부문 중심의 초기 생태계를 어떻게 견고하게 만들 것인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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