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향한 길 함께 걷는 한·보스니아[공관에서 온 편지]

[이승범 주크로아티아대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국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이 작은 발칸 국가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사의 흐름을 뒤흔드는 굵직한 전환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도 위에서는 변방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는 늘 세계 질서의 균열이 시작되던 공간이었다.

이승범 주크로아티아대사(사진=외교부)

보스니아는 늘 세계사 변곡점에 서 있었다.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고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를 비극으로 마무리했다.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발칸 그리고 보스니아가 있었다.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은 우리에게도 상징적이다. 불과 4년 뒤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 속에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사라예보의 보스니아는 이후 정치적 전환과 구조적 변화를 겪으며 복합적인 과제와 마주하게 됐다.

얼마 전 필자는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경기장을 찾았다. 한때 환호로 가득했던 트랙은 숲에 파묻히고 벽면은 방문객들의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날짐승의 둥지가 된 그곳에서 영광이 얼마나 쉽게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 풍경은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늘과 겹쳐 보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해 온 공간이다.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 정교회를 따르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인이 복합적으로 살아왔다. 모스크와 정교회 성당, 가톨릭 교회가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모습은 이 나라의 일상이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현대 유럽이 겪은 가장 혹독한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 대규모 강제 이주, 집단 학살은 국제사회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이를 멈추기 위한 국제사회의 선택이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이었다. 이를 통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단일 국가로 유지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세르비아계를 대표하는 스릅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및 크로아티아계를 대표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이라는 독특한 이중 구조를 갖게 됐다.

올해는 한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교 30주년이자 데이턴 평화협정 30주년이다. 한국은 전쟁과 분단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나라로서 데이턴 평화협정의 근간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권과 영토적 일체성, 국가적 통합을 지지하며 발칸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약 400만달러에 달하는 소규모 무상원조를 통해 구급차, 학교 정보기술(IT)기자재, 태권도홀 건립 등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지원해 왔으며 대외경제협력기금을 활용해 병원 현대화 사업에도 일조한 바 있다. 규모는 작지만 대사배 태권도대회를 비롯한 문화·인적 교류도 매년 꾸준히 추진 중이다.

사라예보의 총성과 서울의 성화는 비슷한 시기의 서로 다른 양상이었지만 평화와 안정을 향한 양국의 염원은 같다. 지난여름 사라예보 시가지를 누빈 양국 수교 30주년 트램에 새겨진 ‘30년 우정과 협력’이라는 문구처럼 앞으로 30년, 50년, 그 이상을 내다보며 평화를 향한 여정을 양국이 함께 다져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