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말 문을 연 대전의 창고형 약국. 이준섭 기자
높은 선반 위로 박스가 층층이 쌓여 있고 통로 사이로 장바구니를 든 손님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약병이 빼곡히 들어찬 진열대 앞에서 한 시민은 상자를 돌려보며 성분표를 확인하고 다른 손은 이미 약이 가득 담긴 바구니 손잡이를 꼭 쥐고 있다. 대전에 첫 문을 연 이른바 ‘창고형 약국’의 풍경이다.
이 약국은 지난달 말 문을 열었다. 226㎡ 규모로 일반 동네 약국보다 다섯 배가량 넓은 매장 안에는 감기약과 소화제 같은 일반의약품이 마트 진열대처럼 층층이 꽂혀 있다. 한쪽에는 영양제와 여성용품, 건강식품이 따로 구역을 이루고 발 사이즈만 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손님들이 선반 앞에 서서 약을 고르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이어진다. 대표약사를 포함해 약사 3명이 상시 근무하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무기는 가격이다. 제약사에서 물량을 통째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일부 품목 가격을 일반 약국보다 낮게 책정했고 지역화폐로 결제하면 일정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다. 한 번에 상비약을 여러 개 담아도 결제대 화면에 찍히는 금액은 예상보다 낮다. 손님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아이와 함께 매장을 찾은 한 시민은 진열대를 살피다가 진통제 상자를 집어 들며 “평소 자주 사는 약을 한곳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고 늦은 시간에도 들를 수 있어 선택지가 늘어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장바구니 속에 들어간 해열제와 파스, 비타민이 이 약국에 대한 기대를 대신한다.
이수현 씨도 “건강 관련한 거니까 계획 없어도 그냥 연말이고 해서 내년 위해 투자 겸 쟁이러 왔다”라고 흡족해했다.
그러나 지역 약사단체의 시선은 다르다. 대형 매장을 앞세운 가격 경쟁이 과도한 약 구매나 잘못된 복용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강병구 대전시약사회 부회장은 “창고형 약국은 마트처럼 소비자가 약사의 관리 범위를 벗어나 자율 쇼핑을 하는 구조로 의약품의 충동구매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약국이 특정 대형 매장으로 쏠리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던 동네의 1차 안전망이 무너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자치단체도 변화의 속도를 살피고 있다. 이 약국은 개설 초기 ‘창고형’, ‘마트형’ 같은 표현을 내걸고 홍보했지만 관할 자치구는 소비자 인식에 혼선을 줄 수 있는 이유로 문구 삭제를 요청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의 대응도 시작됐다. 보건복지부는 약사법 시행령 개정안을 예고하고 ‘창고형’, ‘특가’ 등 가격을 전면에 내세우는 광고 문구 사용을 제한하는 방안을 내놨다. 창고형 약국은 소비자와 약사, 자치단체와 정부가 서로 다른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쏟아내는 실험 무대가 됐다. 상시 방문이 가능한 대형 매장과 저렴한 가격이라는 장점 뒤에 약 오·남용과 동네 약국 생태계 붕괴라는 숙제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선택권과 약의 안전한 사용, 지역 약국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제도와 운영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지 창고형 약국 선반 사이로 지역 보건의 새 과제가 드러나고 있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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