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요즘 시장에 나가면 곳곳에서 주황빛으로 익어가는 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늦가을 햇살을 머금고 있는 감나무 풍경도 눈에 많이 띈다. 우리나라에서 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재배돼 온 중요한 과일 중 하나다.
감나무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중국·일본이 원산지인 대표적인 과수로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삼한 시대 이전부터 이미 재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외 연구에서는 한반도의 신생대(제3기) 지층에서 감나무 화석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는데, 이는 인류 출현 이전부터 이 땅에 감나무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감 재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 시대 문헌에서 확인된다. 1138년(인종 16년)에는 '고욤'이라 불리는 작은 떫은 감나무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236년에 편찬된 의약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경상도 고령 지역에서 감을 재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세종실록지리지(1454)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 각종 지리지에 상주 등지의 감 재배 현황이 상세히 기록되면서, 감이 지방 특산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감나무는 씨를 심으면 그대로 단감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고욤나무가 자라고 여기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우리가 먹는 감이 열린다. 접목을 통해 더 맛있고 품질 좋은 열매를 얻는 이 과정은,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자손이 윗세대의 덕을 잘 이어받아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예로부터 감나무는 오절(五絶)과 오상(五常)의 덕을 겸비한 영험한 나무로 꼽혔다. 오절이란 장수한다(壽), 새가 잘 둥지를 틀지 않는다(無鳥巢), 벌레가 잘 먹지 않는다(無蟲), 잎이 넓어 글씨 연습에 좋다(文), 나무가 단단해 화살촉 재료로 쓰인다(武)는 다섯 가지 뛰어난 점을 말한다.
오상은 유교의 다섯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상징하는 문(文)·무(武)·충(忠)·효(孝)·절(節)을 감나무에 비유한 것으로, 예를 들어 충(忠)은 겉과 속이 같이 붉은 감의 빛깔에서, 효(孝)는 이가 약한 노인도 쉽게 먹을 수 있을 만큼 과육이 부드럽다는 점에서 찾았다.
조선 성종 대 이후 감은 한가위 중추절(추석)의 제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제례상의 필수 과일 구성인 대추·밤·배·감 가운데 감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배경이다.
대추는 후손 번창, 밤은 결실, 배는 청렴과 순수함, 감은 인내와 충절·풍요 등을 상징하며, 제례 문화 속에서 감은 상징성과 길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됐다.
우리나라는 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가공 기술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1470년(성종 1년) 무렵 문헌에는 이미 건시와 수정시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곶감은 껍질을 벗긴 떫은 감을 건조시켜 만든 건과(乾果)로, 수분이 줄어들고 당분이 농축돼 달콤한 맛과 특유의 식감을 갖게 된다.
겉에 생기는 흰 가루, 즉 시상은 당분이 결정화된 것으로 예로부터 약재로도 활용됐다. 2015년에는 고려 시대(12~1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선박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곶감이 함께 출토돼, 곶감 소비 문화가 문헌 기록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홍시, 준시(납작하게 눌러 말린 감) 등 다양한 가공 형태의 감은 왕실의 일상식과 행사 음식, 후식으로 폭넓게 쓰였다. 특히 상주, 청도, 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도 국가·지역 차원의 농업유산으로 인정받으며 관광자원화되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던 감은 대부분 떫은맛이 강한 재래종이었고, 이를 홍시나 곶감으로 만들어 먹는 문화가 발달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아삭하고 달콤한 단감(甘) 품종은 20세기 초, 주로 1910~1920년대에 일본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는 단감 품종인 부유(富有)와 차랑(次郞) 등이 이때 들어온 품종이다. 단감의 첫 재배지에 대해서는 김해 진영, 창원 대산면 '빗돌배기마을' 등 남부 지방 여러 지역이 거론되며, 이들 지역은 이후 단감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 밖에도 상주의 곶감, 씨 없는 청도 반시, 큰 크기와 진한 맛의 하동 대봉감 등 각 지역의 기후와 토양 특성에 맞춘 감 품종들이 명성을 얻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감은 당도가 높고 수분 함량이 많아 발효를 통해 술을 빚기 쉬운 과일이다. 고려 시대 이후 가정에서 감을 활용해 과실주 형태의 술을 빚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지만, 민간에서 전해지던 술은 문헌에 잘 남지 않고 다른 이름 아래 흡수되거나 명맥이 끊어진 경우가 많아 구체적인 실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조선 시대 주방문과 지방지, 민속 기록 등에서 곶감·홍시·감식초 등을 이용한 음용법과 약용법이 간간이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감이 일찍부터 발효와 양조의 재료로 활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감을 사용한 다양한 발효주(과일주·탁주)와 증류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먼저 과일주는 흔히 '감와인'이라고 부르며, 수확한 감을 압착해 얻은 즙을 발효시킨 뒤 여러 차례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 만든다. 감 특유의 당분과 타닌, 유기산이 어우러져 독특한 향과 맛을 형성하는데, 일부 연구에서는 감이 포도보다 풍부한 특정 폴리페놀·타닌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항산화 잠재력이 높다고 보고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감와인으로는 충남 논산 양촌와이너리의 '추시', 경북 상주 젤코바와이너리의 '젤코바 스위트 홍시', 경북 청도의 청도감와인(감그린 레귤러 및 스페셜), 경북 영천 뱅꼬레와이너리의 '뱅꼬레 감와인', 경남 창녕 맑은내일의 '단감명작', 전북 완주 오연가의 '오연 프리미엄' 등이 있다.
감와인은 한국 음식과의 궁합이 특히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름진 고기 요리나 매운 음식과 곁들여 마실 경우 감의 산미와 부드러운 떫은맛이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감칠맛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탁주(막걸리)의 경우에는 일반 막걸리 제조 과정에 감을 통째로 넣거나, 감즙을 첨가하기도 하며, 단감·곶감·감식초 등을 활용하는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한다. 감 막걸리는 감 특유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과 막걸리의 은은한 산미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경북 상주 은척양조장의 '은자골 곶감 생탁배기', 상주곶감유통센터의 '상주 곶감막걸리', 서울 같이양조장의 '곶감막걸리 주정범이', 전북 완주에서 생산되는 '흑곶감막걸리', 경북 청도 '감이조아'의 감막걸리, 경남 창원 '조아서'의 '직감' 등 지역별로 개성을 살린 제품들이 출시돼 있다. 이들은 지역 특산 감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전통주 시장에서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하고 있다.
감 증류주는 감와인을 증류해 만든 술로, 서양의 브랜디(Brandy) 제조 방식과 유사하다. 발효주에서 알코올과 향 성분을 증류해 농축하는 과정에서 감 열매 특유의 풍미와 향이 응축되는 것이 특징이다. 충남 논산 양촌와이너리의 '아치23'과 '감 보드카', 경북 상주 젤코바와이너리의 '호렝이눈물 21·40', 전북 완주 오연가의 '오연25·오연41·오연52' 등이 대표적인 감 증류주로, 각각 알코올 도수와 숙성 방식, 향의 농도에 차이를 두어 고급 증류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감을 활용한 다양한 술이 존재한다. 감은 비타민 A·C, 식이섬유, 타닌, 플라보노이드 등 여러 유효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숙취 해소, 감기 예방, 항산화와 노화 방지, 눈 건강 증진, 혈관 건강 개선, 장 건강 및 변비 완화 등 여러 잠재적 효능이 보고돼 왔다.
특히 떫은 감과 곶감에는 응축된 타닌과 폴리페놀 성분이 풍부해,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혈중 지질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되고 있다. 다만 과도한 섭취 시 위장 장애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건강 기능성을 기대하더라도 적정량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감은 술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 디저트와 혼례 음식에서도 중요한 재료로 쓰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두 곶감말이'이다. 곶감을 펼쳐 씨를 제거한 뒤 호두를 넣고 돌돌 만 간식으로, 조선 후기 이후 상류층과 양반가의 고급 다과, 폐백 음식에서 자주 등장하던 메뉴다.
오늘날에는 여기에 크림치즈나 다양한 견과류를 더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버전도 인기가 많으며, 달콤한 곶감과 고소한 호두, 그리고 약간의 치즈 풍미가 어우러져 전통주와도 훌륭한 궁합을 보여준다.
초겨울 바람이 서늘해지는 이맘때, 호두 곶감말이를 한 입 베어 물고 감으로 빚은 술을 한 잔 곁들이면,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서 자라온 감나무와 조상들의 삶, 그리고 오늘의 K-리큐르 문화가 한데 겹친다.
한 알의 감이 건너온 시간과 이야기를 떠올리며, 달콤한 유혹 속에 담긴 우리 고유의 맛과 미학을 천천히 음미해 볼 만한 계절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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