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이재명 정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포함되지 않는 ‘사각지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법안을 만들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플랫폼노동희망찾기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전국금속노동조합 4층 회의실에서 ‘라벨 떼고 권리 붙이기 정책토론회’를 열고 이재명 정부의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하 일하는 사람법)’과 노동 관련 법안 개선 방향성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계 전문가들과 대안을 제안하는 자리를 가졌다.
앞서 정부는 지난 11월 21일 일하는 사람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하는 사람법은 근로기준법 등 기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등 모든 일하는 사람의 보편적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안전하고 공정한 노동 환경을 제공하려는 취지의 법이다. 일하는 사람법은 연내 발의될 예정이다.
다만 노동계는 정부가 기존의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안을 만들고, 심지어는 새 법안에 처벌 규정을 포함하지 않아 사각지대 노동자에게 또 다른 권리 약화를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 전 정부 판박이 ‘일하는 사람법’...내용·정책 라인 같았다
현장에서 플랫폼노동희망찾기 오민규 집행책임자는 일하는 사람법이 윤석열 정부 당시 추진된 ‘노동약자지원법’의 이름만 바뀐 법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플랫폼·프리랜서와의 소통 창구라고 내세운 ‘권리보호 원탁회의’도 과거 노동약자지원법 추진 과정에서 운영하던 ‘노동약자 원탁회의’의 간판만 바꾼 수준이며 정책 라인도 당시 추진 주체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짚었다.
실제로 윤 전 정부 ‘노동약자지원법’을 추진한 이는 권창준 전 노동개혁총괄국장이었고, 이번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법’을 추진하고 있는 주체 역시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 권 차관으로 동일했다.
내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지난 11월 24일 일부 공개한 일하는 사람법 내용은 △표준계약서 법제화 △노동위원회를 통한 분쟁 알선·중재 △경력관리 시스템 구축 등인데, 이는 이미 과거 법안들에 반복 등장했던 항목들이다.
오 집행책임자는 “민간 플랫폼인 카카오톡도 국민연금 이력 기반의 ‘톡 명함증’으로 경력관리를 해주는 시대에, 정부가 경력관리 서비스를 마치 새로운 권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더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법의 골격에서 노동자의 삶을 좌우하는 핵심 축인 ‘노동시간 문제’와 ‘임금체불 구제’가 사실상 비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1·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일하는 사람법’ 계열 5개 법안을 비교한 결과 공통적으로 노동시간 관련 조항이 아예 없고, 임금체불에 대해 근로기준법 수준의 강제력 있는 구제수단을 두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는 앞서 그간 국회에 발의된 관련 법안들을 참고했다고 한 바 있다.
현장에 모인 노동계 전문가들은 기존의 법안과 별도의 제3지대 특별법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산재보험법, 고용보험법, 산업안전보건법, 최저임금법 등 기존 노동관계법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훨씬 강력한 보호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해결 방안은 ‘노동자 추정제’...“사용자에게 입증책임 져야”
이들 노동계는 공통적으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추정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 추정 제도란 프리랜서, 특수고용직 등 노동법상 노동자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분쟁 발생 시 일단 노동자로 추정하고, 사용자가 반대로 노동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제도를 뜻한다.
정부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확대를 위해 노동자 추정제를 국정과제 중 하나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노동계는 최근 관련 논의가 아예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기존 대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한 실효성 없는 추정제를 준비 중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최정우 미조직전략조직실장은 “현재는 노동자가 스스로 ‘내가 노동자’임을 끝까지 증명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별 노동자가 계약 구조나 회사 내부 실태를 다 들여다볼 수 없다”며 “이 구조를 뒤집어 사용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실장은 “근로기준법 2조에서 노동자 정의를 손보고, 그 안에 노동자 추정 조항을 넣는 것이 먼저”라며 “이 작업 없이 일하는 사람법을 아무리 손봐도 오분류된 노동자의 근로자성 회복은 요원하다”고 말했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하은성 노무사 역시 “퇴직급여보장법도 처음엔 5인 미만 사업장에 퇴직금이 없었지만 2010년부터 전면 확대했고, 직업교육훈련촉진법도 현장실습생에게 단계적으로 괴롭힘 금지 등을 적용해왔다”며 “법을 개정하거나 개별법에서 적용 대상을 넓히는 방식은 이미 우리가 계속 써온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개별 법률에서 ‘근로자’ 범위를 넓힌 사례도 근거로 들었다. 그는 “중대재해처벌법은 보호 대상을 ‘근로자’로 한정하지 않고, 도급·용역·위탁 형식과 상관없이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을 다 ‘종사자’로 본다”며 “중대재해를 막겠다는 목적에 맞추려다 보니 이렇게 정의를 넓힌 것이다. 왜 굳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만 좁혀야 하는지 되묻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하는 사람법 외에도 정부는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 보호를 명분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산재보험법 등 적용 업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노동계 현장의 평가는 냉담하다. 발제에 따르면 현재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가 산안법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전속성 기준(두 플랫폼에 동시에 고용돼 있는 노동자에게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 △적용 조항의 제한 △시행규칙·시행령에 명시된 업종 요건 등 네 가지 ‘허들’을 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정부가 실제로 손대려는 부분은 이 가운데 네 번째 기준인 시행령에 업종을 몇 개 더 추가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리운전 기사·배달 라이더 등은 여전히 감정노동 보호(41조), 작업중지권(52조) 등 핵심 조항에서 배제돼 있고, 일하는 사람법 논의에서도 이 부분을 메우려는 구체적 방안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결과 “위험과 과로는 그대로인데, 정부는 산재보험·산안법 대상 업종을 늘렸다는 실적만 챙기는 구조”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해외 사례 참고하기] 포르투갈의 플랫폼 노동자 추정제
포르투갈에서는 2023년 플랫폼 노동자 추정을 하기 위해 6가지 기준을 도입했다. 실제로 포르투갈 검찰청이 포르투갈의 ‘배달의 민족’ 격인 배달 플랫폼 ‘글로보’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최종적으로 지난 5월 대법원이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배달라이더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아래 추정제 항목 중 4번을 제외한 나머지 5가지를 만족한다고 판단해 기업과 라이더 사이의 고용관계를 인정했다. 추정제는 통상적으로 아래 6가지 기준 중 2개 이상을 만족하면 고용관계를 추정한다고 판단한다.
1) 플랫폼이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 보수를 정하거나 보수에 대해 최소한, 또는 최대한도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우
2) 플랫폼이 노무제공자의 복장,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태도, 활동 수행 절차 등 구체적이고 정해진 규칙을 설정하고 지시하는 경우
3) 실시간으로 업무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통제나 감독이 이뤄지거나 전자적 수단이나 알고리즘 관리 등을 통해 제공된 서비스 품질을 확인하는 경우
4) 작업 조직 방식, 업무를 수행할 시간, 과업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능력, 대체자 사용 또는 하청 허용 여부, 고객 선택권 등이 제한되는 경우
5) 플랫폼이 노무제공자에게 징계 조치를 행사할 수 있거나 계정을 비활성화하거나 미래 과업 참여를 제한하는 등의 권한이 있는 경우
6) 업무 장비 및 도구가 플랫폼 소유거나 임대 계약 형태 활동 수행에 필요한 도구·장비를 플랫폼이 소유하거나 플랫폼이 임대 형태로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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