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수로 권좌에 올랐지만 결국 패배의 쓴잔 든 독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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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수로 권좌에 올랐지만 결국 패배의 쓴잔 든 독재자들

연합뉴스 2025-12-11 11:50:34 신고

스티븐 그린블랫 하버드대 교수가 쓴 신간 '폭군'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의 한 장면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의 한 장면

[이타르타스=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라틴아메리카에서 거둬들인 금과 은으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쥔 스페인을 꺾고 바다를 제패한 건 유럽 변방을 통치한 영국 여왕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곳저곳에 흥청망청 돈을 쓰며 타고난 운을 활용할 줄 모르는 필리페 2세(스페인 국왕)와는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궁정의 칼부림을 보고 자랐고, 이복언니인 메리 1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왕의 꿈을 숨길 줄 아는 야심가였다. 메리 여왕이 죽고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엘리자베스 1세는 20대 중반이었으나 이미 마음마저 곰삭은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탕평책을 활용하며 명문 귀족들의 도전을 막아냈고, 왕위를 노리는 친족들도 느리지만 천천히 제거해 나갔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이타르타스=연합뉴스]

그는 권력의 한계를 신중하게 분별할 줄 알았고, 정치적 감각도 탁월했다. 민간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았다. 그래서 민간에서 떠도는 루머는 적극적으로 차단했다. 당대의 일류 극작가들은 군주를 대놓고 비판하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토머스 내시는 선동죄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도망쳤고, 벤 존슨도 비슷한 죄목으로 수감돼 비참하게 살았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여왕의 비밀 요원에게 살해당했다. 비슷한 시기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셰익스피어만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을 뿐 아니라 부유하게 살았다. 꾸준한 극장 수입, 부동산 물자·물품 거래, 이따금 몰래 하는 대부업으로 순조롭게 부자대열에 합류했다.

비극 '맥베스'의 대사 비극 '맥베스'의 대사

[EPA=연합뉴스]

그렇다고 그가 사회 비판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단지 에두르는 방법에 정통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는 고대 로마, 그리스, 브리튼의 군주들에서 글의 소재를 찾았다. 당대와 적어도 1세기 이상의 시차를 두는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가령 그의 초기작 가운데 한 편인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린 시기와 1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거미줄 같은 검열의 그물망을 벗어난 그의 붓끝은 날카로웠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인물이나 가공인물을 통해 '폭군'들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려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대를 건너뛸수록, 셰익스피어의 통찰은 빛을 발했다. 뛰어난 젊은이들은 독서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남긴 행간의 의미를 얻어갈 수 있었고, 오랜 세월을 견뎌낸 노인들은 책을 읽으며 말년에 지혜를 더했다. 그렇게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그의 작품을 숭상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지혜는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연극 '리어왕' 연극 '리어왕'

[연합뉴스 자료사진]

스티븐 그린블랫 하버드대 교수가 쓴 신간 '폭군'(까치)은 그런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폭군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리처드 3세', '헨리 6세', '리어왕', '맥베스', '코리올라누스', '줄리어스 시저' 등 명편들을 톺아보며 폭군들의 음험한 자질과 만행들을 추적해 나간다.

책에 따르면 폭군들은 대개 승리한다. 가령, 정의롭고 사람 착한 헨리 6세는 그악스럽고, 교활한 요크 가문 사람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내부적 갈등은 국가의 장기를 갉아 먹는 음흉한 벌레와 똑같소"라고 말하는 헨리 6세의 말은 왕의 근엄한 말이라기보다는 도학자의 설교문처럼 들린다. 요크 공작은 "책에 적힌 대로 통치한다"며 그를 경멸한다. 요크 가문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교활한 남자인 리처드 3세는 온갖 술수를 써 결국 왕이 된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과 기만적인 약속은 그의 승리에 발판이 된다.

연극 '리처드 3세' 연극 '리처드 3세'

[EPA=연합뉴스]

문제는 이런 교활함이 왕국의 미래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리처드 3세는 인재를 모으기는커녕 있던 인재들도 가차 없이 죽인다. 그는 관리능력이나 외교적 수완도 없다. 측근 중에 그가 명백히 가지지 못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도 전무하다.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폭군이 오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상하는 폭군이 아무리 교활할지라도, 권좌에 오르면 의외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능력이 무능력으로 전환될 때, 그 말로는 비참해진다. 저자는 폭군의 말로를 이렇게 정리한다.

"국정에 대한 전망도 없어 지속적인 지지를 확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잔인하고 폭력적임에도 모든 반대파를 진압할만한 실력도 갖추지 못한다. 고립과 의심, 분노는 종종 오만한 과신과 결합해 몰락을 재촉한다."

[까치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까치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불안정과 과신, 격노에 시달리는 야망의 화신들(폭군)은 결국 외톨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군중은 어리석고 배은망덕하며, 선동가들에 잘 현혹되지만 종국에는 상황을 파악한다.

"독재자와 그 앞잡이들은 그들 자신의 사악함 때문에 균열하며, 억압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진압할 수 없는 민중의 정신에 압도되어 반드시 파멸한다고 셰익스피어는 믿었다."

탁월했던 그린블랫 교수의 전작 '1417년 근대의 탄생'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이 책도 그렇게 읽을 가능성이 높다. 폭군에 대한 생생한 묘사, 흠잡을 데 없는 대사, 무릎을 치게 하는 저자의 탁견 등 주목해서 볼만한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비극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함께 인생과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통찰이 책에 담겼다. 읽고 나면 책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싹틀지도 모른다.

김한영 옮김. 256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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