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개혁입법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합리적으로 처리됐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표면적으로는 상식과 절차를 강조한 당부지만, 시점과 대상, 이를 둘러싼 여야의 반응을 종합하면 내란전담재판부·법왜곡죄 등 사법개혁 패키지를 둘러싼 ‘속도와 설계 조정’ 요구로 읽힌다. 동시에 민주당은 “대통령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며 개혁 드라이브 후퇴 가능성을 일축했고, 국민의힘은 ‘8대 악법’ 천막 농성으로 맞불을 놓으며 ‘전체주의’ 프레임을 극대화하고 있다. 겉으로는 원론, 안으로는 치열한 수 싸움이 진행 중인 셈이다.
국민 눈높이와 ‘합리적 처리’, 왜 지금 꺼냈나
첫째로 눈에 들어오는 건 대통령이 사용한 표현이다. ‘국민의 눈높이’, ‘합리적 처리’는 어느 정권에서나 즐겨 쓰는 상투적 용어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의도적인 정치 언어다. 특히 개혁입법, 그 중에서도 내란전담재판부처럼 강한 논란을 동반하는 법안을 두고 이 말이 나온 시점은 더욱 그렇다. 민감한 사안일수록 대통령의 한 문장이 정치 지형 전체에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앞서 국무회의에서도 개혁과 관련해 “갈등과 저항은 불가피하지만 국민 상식과 원칙에 맞게 합리적으로 처리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낮에는 국무회의, 저녁에는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거의 같은 어휘를 반복했다는 건 ‘우발적 한 마디’가 아니라, 대통령실이 미리 설계한 메시지라는 뜻이다. 단순한 당부라기보다 ‘개혁의 범위와 방식’을 둘러싼 가이드라인에 가깝다.
이 표현에는 두 층이 동시에 들어 있다. 하나는 “개혁 후퇴는 없다”는 강경한 기조다. 대통령은 내란 청산과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고, 여당 지지층 역시 이를 ‘정권교체의 핵심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물러날 경우 집권세력 내부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
다른 한 층은 ‘절차와 설계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신중함이다. 사법부와 법조계, 범여권 일부까지 내란전담재판부의 위헌성을 거론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 눈높이’와 ‘합리성’을 거듭 언급하는 건, “정치적 명분 싸움에서 판을 잃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라”는 신호로도 읽힌다. 개혁의 방향은 유지하되, 설계는 다시 살피라는 주문이다.
결국 이 표현은 브레이크와 액셀을 동시에 밟는 언어다. 개혁의 목표를 명시해 지지층을 안심시키면서도, 그 방법론에 대해선 여지를 남겨두는 양면적 구조다. 대통령의 말이 ‘정책 지시’이자 ‘정치 신호’로 작동하는 만큼, 이중 구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당의 향후 입법 전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란전담재판부·법왜곡죄, 대통령 발언의 실제 표적
대통령의 발언이 겨냥한 구체적 대상이 무엇이냐를 두고 정치권 안팎의 해석은 이미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 바로 민주당이 12월 임시국회 강행 처리를 예고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과 법왜곡죄 신설 등 사법개혁 패키지다. 형식적으로는 ‘개혁입법 전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법개혁 법안이 핵심 타깃이라는 데 이견이 크지 않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은 내란 혐의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를 별도로 두고, 3대 특검 사건을 각각 맡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재판부 구성과 사건 배당 방식이다. 추천위원회가 후보를 추려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구조지만, 특정 사건을 염두에 둔 ‘사건 지정 재판부’라는 점에서 사법부 독립·재판의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사법부 내부에서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공식 회의에서 제기된 바 있다.
법왜곡죄 역시 비슷한 맥락의 논란을 낳고 있다. 검찰·판사 등 법률가의 법 해석·적용이 ‘고의적 왜곡’으로 판단될 경우 형사처벌을 하는 내용인데, 이는 곧 법관의 양심과 재량 영역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야당은 “사법부 겁박·장악 법안”이라고 성토하고, 일부 법조계 인사들조차 “해석의 영역을 범죄화하면 법 자체가 경직된다”고 우려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를 강조한 건 법안의 정치적 정당성뿐 아니라, 사법적 지속 가능성도 계산에 넣고 있다는 신호다. 여당이 강행 처리하더라도 헌법재판소 문턱을 넘지 못하면, 정치적 성과는커녕 역풍만 맞을 수 있다. 위헌 논란이 구조적으로 내장된 법안일수록, 입법 직후 ‘위헌심판 대기 중인 법’이 되는 시나리오를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통령 발언을 단순한 원론이 아니라 ‘실무 지침’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메시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된다. “법안 자체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위헌 시비와 사법부 집단 반발, 독단적 강행 프레임이 한꺼번에 덮쳐오는 설계는 피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혁의 타깃과 방향은 유지하되, 입법 기술과 절차를 다시 짜 오라는 요구에 가깝다.
정청래의 ‘3단계 청산론’과 여당 내 역할 분담
같은 이슈를 두고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혀 다른 톤의 언어를 꺼내 들었다. 1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정 대표는 “1단계 사법적 청산, 2단계 경제적 청산, 3단계 문화적 청산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며 내란 청산의 장기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 중심에 내란전담재판부와 2차 종합특검을 놓겠다고 공언했다.
정 대표의 발언은 대통령의 ‘합리적 처리’ 주문과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대통령은 같은 목표를 말하면서도 ‘국민 눈높이’ ‘합리성’처럼 수위를 조율하는 언어를 쓰고, 여당 대표는 ‘발본색원’ ‘가용 수단 총동원’이라는 강경한 표현으로 지지층을 향해 메시지를 날린다. 두 축이 서로 다른 톤을 유지하며, 전체 서사를 나눠 맡고 있는 셈이다.
여당 내부에서 이는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써의 기능을 한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자 통합의 상징으로서,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국민 여론과 제도적 안정성을 고려하는 조정자 이미지를 가져간다. 반면 당 대표는 지지층의 분노와 개혁 열망을 대변하는 전위대 역할을 맡아, 사법개혁 드라이브의 동력을 유지한다. 둘 사이의 거리감은 때로 긴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도된 분업 구조일 수 있다.
정 대표가 광주에서 ‘5·18 정신’과 ‘12·3 비상계엄’ ‘87년 체제 헌법’을 한 줄로 꿰어내는 서사를 동원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내란 청산을 단지 특정 정권·사건의 책임 추궁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과제를 완수하는 과정으로 재규정하려는 시도다. 이는 내란전담재판부 논란을 ‘법기술 논쟁’ 차원을 넘어, ‘역사·정체성의 싸움’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노린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합리성’ 언어와 정 대표의 ‘단죄·청산’ 언어는 상호 충돌이라기보다,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로 읽힌다. 한쪽은 외연 확장을, 다른 한쪽은 핵심 지지층 결집을 맡는다.
국힘의 ‘8대 악법’ 천막 농성과 전체주의 프레임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여당 내부를 향한 미세 조정 신호라면, 국민의힘은 같은 이슈를 ‘정면 충돌’로 끌고 가려 한다. 국회 본청 앞에 천막을 치고 8대 악법 저지 농성에 돌입한 건 정권 교체 이후 첫 장외 투쟁 성격을 가진 이벤트다. 내란전담재판부, 법왜곡죄, 대법관 증원, 4심제 도입 등 사법개혁 법안과 유튜버 징벌적 손배·현수막 규제·필리버스터 제한을 모두 묶어 ‘사법파괴 5대 악법 + 국민입틀막 3대 악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국민의힘이 택한 핵심 언어는 ‘전체주의’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이 법들이 완성되면 그야말로 전체주의 국가가 된다”고 규정했고, 장동혁 대표는 “민주주의 마지막 둑인 사법부와 국민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란전담재판부 논쟁을 단지 위헌성 여부나 제도 설계 공방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직결된 생존 문제로 끌어올리는 프레이밍이다.
천막 농성 방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힘은 의원 107명을 4개 조로 나누어 릴레이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시간표를 짜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당 전체가 몸으로 막고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겠다는 의도다. 이는 단기 성과보다는 장기 국면에서 여론을 ‘개혁 vs 전체주의’의 이분법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문제는 이 프레임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느냐다. 사법부와 법조계 일부가 내란전담재판부의 위헌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곧장 ‘전체주의 국가’라는 단어로 넘어가는 것이 중도층에게도 설득력을 가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과도한 위기 담론은 지지층 결집에는 도움이 되지만, 중도층에는 ‘정치 과잉’으로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반대로 여권 입장에서도 야당이 쳐놓은 ‘전체주의’ 프레임은 부담이다. 사법개혁을 강하게 추진할수록, ‘사법 장악·입틀막’ 논란이 증폭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의 ‘국민 눈높이’ 발언은, 여당이 이 프레임을 정면에서 부정하면서도 위헌 논란을 흡수할 수 있는 실질적 설계와 절차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으로도 작동한다. 야당의 ‘전체주의’ 언어가 강해질수록, 여당의 ‘합리성’ 언어도 함께 정교해질 수밖에 없다.
李 “합리적 처리” 발언, 브레이크가 아닌 ‘조향 장치’
그렇다면 이재명 대통령의 “합리적 처리” 발언은 개혁입법에 브레이크를 건 것일까. 지금까지의 정황을 종합하면, 답은 ‘브레이크’라기보다는 ‘조향 장치’에 가깝다.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반대가 크다고 추진을 안 하는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고, 내란전담재판부·법왜곡죄 추진 기조를 공식적으로 접은 적도 없다. 대통령 또한 내란 청산과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해 왔다. 방향 전환이 아니라, 진행 방식 조정에 가깝다는 뜻이다.
향후 변수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여당 내부 조정이다. 우상호 정무수석이 언급했던 ‘내란전담재판부 2심 전담’ 같은 절충안이 다시 부상할지 여부, 법관 추천·임명 구조나 적용 범위를 어떻게 다듬을지에 따라 위헌 논란의 강도와 사법부 반발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입법 기술 조정’을 여당과 법사위, 전문가 그룹이 함께 숙의하라는 신호로 읽힌다.
둘째, 입법 이후의 사법전이다. 여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더라도, 곧바로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입법의 정치적 성과는 헌재의 최종 판단과 직결된다.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경우, 여당은 ‘사법개혁 실패’라는 정치적 상처를 감수해야 하고, 헌재도 정치 한복판에 서는 부담을 안게 된다. 대통령이 ‘국민 상식과 원칙’을 거듭 강조한 것은 이 단계를 염두에 둔 포석일 수 있다.
셋째, 여론전이다. 국민의힘은 8대 악법 프레임과 천막 농성으로 장외 투쟁의 물꼬를 텄고, 민주당은 내란 청산을 5·18·6월 항쟁과 연결하며 역사·도덕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두 서사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중도층과 무당층이 어느 쪽 언어에 더 설득력을 느끼느냐가 향후 정치 지형을 좌우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의 ‘국민 눈높이’ 언어는 여당이 중도층을 향해 던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정치문법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발언은 하나의 문장에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담아낸 셈이다. 여당에겐 “개혁의 방향은 유지하되, 설계는 다시 보라”는 지시, 야당과 사법부에겐 “무리한 강행은 하지 않겠다”는 신호, 국민에겐 “개혁을 하더라도 상식과 원칙 안에서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세 기능이 실제 정치 일정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느냐에 따라, 내란전담재판부를 둘러싼 공방은 다른 국면으로 흘러갈 수 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이재명 정부의 사법개혁은 ‘정치 보복’과 ‘체제 수호’라는 상반된 프레임을 넘어, 국민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개혁’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대통령의 한 문장이 그 문턱을 낮추는 발판이 될지, 아니면 양쪽 모두에게 불충분한 타협 언어로 남을지는 앞으로의 국회, 사법부, 거리 정치가 함께 답해야 할 과제다.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