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성영화인 수상한 윤가은 감독이 말하는 '세계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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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성영화인 수상한 윤가은 감독이 말하는 '세계의 주인'

BBC News 코리아 2025-12-10 15:57: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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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이 B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BBC
윤가은 감독은 자신이 영화 속 인물 '주인'은 아니지만, 그와 닿아 있는 경험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두 팔 위로 뻗고 만세하고 싶었어요. 나 여기 살아있다, 잘 살아있다, 만세!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어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 A 씨는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BBC에 이렇게 말했다.

또 다른 관객 김영서 씨는 적막한 침묵의 순간을 기억했다. 12살에 친족 성폭력을 경험하고 현재 심리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 씨는 극장에서 혼자 온 여성 관객들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 중에는 분명히 주인이(극 중 주인공)들이 있을 거예요."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어린 시절 친족 성폭력을 겪은 십대 소녀 '주인'의 일상을 따라간다.

윤 감독은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성폭력을 영화로 다루기까지 오랜 고민했다고 밝혔다.

누군가의 상처를 되짚는 일이 될까 망설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의 섬에서 더 외롭게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사건의 경위를 되짚는 대신, 학교와 연애, 가족과 우정, 흔들림과 평온이 공존하는 주인이의 삶을 보여줬다. 사건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서사에서 벗어나 '그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 '세계의 주인' 장면: 주인이와 학교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바른손이앤에이
윤 감독이 연출한 '세계의 주인'은 16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가장 흥행한 한국 독립예술 영화가 됐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했나

"아주 하기 싫은 이야기였어요. 동시에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

윤 감독은 자신이 영화 속 인물 '주인'은 아니지만, 그와 닿아 있는 경험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주인이와 맞닿은 제 경험들이 있고, 제 친구들의 경험들도 있어요. 어린이든 여성이나 남성이든,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겪는 어떤 상처와 고통과 연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를 "영원히 비밀로 하고 싶은 동시에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종류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윤 감독은 2017~2018년 한국 페미니즘 운동과 미투 운동의 흐름 속에서 성폭력을 둘러싼 사회적 언어가 조금씩 생겨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 전후로 그는 영화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으로 여성 청소년 서사를 이어왔다. 그러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세 번째 영화를 준비해야 되는데 사실상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됐다.

영화를 다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허투루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팬데믹으로 모두 다 같이 어떤 종말로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두려움과 맞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어쩌면 성폭력이란 테마를 들여다보는 것이 저한테는 죽음과 맞서는 용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한편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는 시대에 그는 "고통이 꼭 극복의 대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윤 감독은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지난해 가을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올해 10월, 오래 망설였던 이야기는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실제 '주인'들을 만나며 영화 제작

윤가은 감독이 B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BBC
윤 감독은 "영화로 인해 누군가가 다시 상처받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밝혔다

윤 감독은 영화의 방향성을 검토하기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자문을 구했고, 상담소를 통해 실제 '주인'의 삶을 살아온' 성폭력 생존자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가장 두려운 지점이 "영화로 인해 누군가가 다시 상처받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생존자들과의 만남에서 예상 밖의 방식으로 흔들렸다.

"제가 주춤하고 있었는데, 생존자분들이 '상처받아도 괜찮아요. 앞으로 나가봅시다'라고 손을 잡아주는 느낌이었어요. 그분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윤 감독은 인터뷰 과정에서 생존자들에게 피해 사실을 묻지 않았다. 관심은 "어떤 하루를 살고 있는지"였다. 감독이 실제로 들은 이야기의 대부분은 일과 가족, 친구, 연애, 다이어트 같은 평범한 일상과 고민이었다.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다양한 생존자들 사이 "어떤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성폭력 피해는 광범위하고 생존자의 얼굴도 너무 다양해요. 그래서 이런 모습도 맞고, 저런 모습도 맞다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어요."

그는 "일말에 남아 있던 선입견이 와장창 깨졌고" 그 경험은 주인공을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건이 아닌 '사람'이 먼저 보이는 이유

윤 감독이 택한 방법은 '주인'의 옆에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규정해 놓고 소개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 방식은 인물을 알아가는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윤 감독은 관객이 인물에게 '일어난 일'보다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만나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의 중반까지 주인이가 성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기 어렵다.

"관객이 주인이와 처음 만나는 것처럼 시작하고, 시간이 쌓이면서 그 아이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한 겹, 한 겹 알아가도록 하고 싶었어요. 친구를 알아가는 경험처럼요."

영화 속 주인이는 여느 10대 소녀처럼 많이 웃고, 울고, 춤을 추고, 떼를 쓰고, 사랑하고, 이별도 한다.

이는 실제 생존자들이 말하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대 때부터 6년간 그루밍 성폭력을 겪은 20대 생존자 B는 "피해를 당하면서도 행복한 일은 있다. 당시에 내가 웃으면 웃어도 되는 건가? 괜찮다가 안괜찮고 그러다 또 괜찮아지기도 하고. 이런걸 스스로 못받아 들였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를 보며 '잘 살고, 사랑하고, 웃는 순간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감정이 무너지는 순간도 있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괜찮아도 괜찮고, 안 괜찮아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깊게 남았다고 했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원장은 기존에 있는 성폭력 주제의 영화들이 참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사회고발의 역할을 했다면 '세계의 주인'은 "한 발 앞서서 미래를 제시하는 영화"라고 평가했다. 피해자의 삶이 망가진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민용준 영화 평론가 역시 이 작품이 감정을 강요하거나 분노, 연민 같은 감정을 소비하게 만드는 대신 "사람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라고 말했다. 서사를 압축하거나 폭발시키지 않고 끝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결론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영화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당사자의 처참한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등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관객도 있다. 그러나 두 전문가는 공통적으로 영화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열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원장
BBC
조 원장은 "세계의 주인의 취지와 목표가 상담소가 해 온 활동과 같다"며 "우리가 하는 운동을 영화 한 편이 몇 배를 더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대를 잘 반영했다'

'세계의 주인'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잘 맞닿았다는 평가도 있다.

조 원장은 지난 30여 년간 한국 사회가 성폭력 문제를 다뤄온 흐름 속에서 이 영화를 바라봤다. 그는 19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보호시설 도입, 이어진 시민사회 운동, 그리고 2017년 미투 운동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성폭력 피해자 잘못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공론장을 통해 확장돼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은 여전히 말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고 지적했다. 가족 내부에서 가해자를 드러낼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친족 성폭력은 미투의 대열에 잘 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식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며 "몇 년 전만 해도 이 영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관심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영화 흥행 시기와 맞물려, 지난 2일 국회는 만 19세 미만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번 개정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에 한정돼 있으며, 연령 제한 없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해서는 현재 계류 중인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통과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친족 성폭력의 핵심은 연령이 아니라 가족 구조 안의 권력 불평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이주여성 친족 성폭력 사건에 따른 공동대책위원회가 이주 여성 친족성폭력 사건이 무죄가 선고된데 따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News1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2022~2024년 사이 성폭력 피해자 상담 통계를 분석한 결과, 친족 성폭력 피해는 최근 3년간 1만 7045건으로 집계 됐다. 이 중 강간·유사 강간이 53%, 강제추행이 41%를 차지했다

'주인'들과 함께 사는 법

김영서 씨가 B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BBC
친부에게 약 9년간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수기로 기록한 김영서 씨는 친족 성폭력을 "지진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친부에게 약 9년간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수기로 기록한 김영서 씨는 친족 성폭력을 "지진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땅과 같은 존재잖아요. 그런데 그 땅이 흔들려 버리면, 아이는 지진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생존 모드로 버티는 수밖에 없어요."

김 씨는 아직도 세상 곳곳에는 "당신이 알아채지 못한 주인이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생존자의 삶을 '망가진 인생'으로 단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얘는 이제 어떻게 살아, 인생 망했네'라고 생각만 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주인이가 '사실 나 이런 일 있었어'라고 하며 조금 더 편하게 다가올 수 있어요. 그들의 삶이 우리와 함께 평범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걸 인정해 준다면 훨씬 편안하게 같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말한 변화의 가능성은 일부 관객들의 반응에서 나타났다.

'세계의 주인'을 본 조민희 씨는 BBC에 "그전까지 성폭력 생존자를 향한 시선에 '동정'이 있었던 것 같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평범한 일상을 주체적으로 쟁취한, 또는 쟁취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며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객 서진원 씨는 "(피해자)'답게'라는 폭력을 멈추고 각자 견디고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해 주기, 타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가 말로 위로를 건네기보다 조용한 연대의 방식을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했다.

"주인이가 스스로 삶을 회복해 가는 데에는 결국 본인의 힘이 가장 컸지만, 그 옆에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생존자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피해를 말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관계,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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