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미국이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반도체 ‘H200’의 중국 판매를 조건부로 허용하면서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이 다시 혼돈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세계 각국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 수출 규제 완화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게 새로운 시장 기회의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최근 성능 제한 조건을 전제로 한 H200의 중국 내 판매를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기존 규제 기준에 맞춘 맞춤형 모델을 준비했으며 이는 A800·H800보다 높은 사양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추가 매출을 올리고 중국 내에서의 시장 경쟁력을 크게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H200은 AI 연산 성능과 메모리 효율이 개선된 제품으로 공급이 재개되면 고대역폭메모리(HBM3E) 수요가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AI 인프라 투자가 다시 가속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HBM3E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반등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 美, H200 판매 완화로 AI 반도체 시장 ‘재편 시그널’
이번 반도체 수출 완화 조치는 미국 행정부의 전략적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강력한 수출 통제가 오히려 화웨이 같은 중국 기업의 자체 AI 칩 개발 속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엔비디아 CEO 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국을 미국 기술 생태계에 의존하도록 유도하면서도 최첨단 칩(Blackwell, Rubin 등)은 계속 제한하는 전략적 절충안으로 풀이된다.
미국 정부는 작년 엔비디아 H100·A100 등 최고급 GPU의 중국 수출을 전면 금지했지만 이번에 제한적 조건 하에 H200 판매를 허용했다. 그동안 중국은 성능이 낮은 대체 모델(L20·L2 등)에 의존해야 했으나 이번 조치로 중국 빅테크가 다시 최신 GPU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AI 반도체 병목을 해소하는 핵심은 HBM이다. H200은 기존 H100보다 대역폭과 효율성이 모두 향상돼 있어 HBM3E 탑재가 필수적이다. HBM3E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200용 HBM의 주력 공급사로 삼성전자는 차세대 HBM3E와 HBM4 기술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AI 클러스터 확대로 GPU·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특히 H200은 전력 효율이 높아 데이터센터 업그레이드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H200 조건부 허용 소식 직후 시장 수요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H200은 고용량 HBM을 대규모로 탑재해야 하기에 ‘수출 완화 = HBM3E 수요 확대’로 직결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향 GPU 공급이 다시 늘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모두 중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 텐센트·알리바바·바이두 등 빅테크의 대규모 H200 구매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두 회사의 HBM 라인은 내년까지 풀가동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미국 주도의 규제 틀은 여전히 유효해 정책 리스크는 상존한다. 한 관계자는 “이번 조치가 일시적 완화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 중국, H200 기반 초대형 모델 개발 가능성…미·중 AI 리그 '심화'
기대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번 조치가 중장기적으로는 AI 패권 경쟁의 불균형을 심화시킬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H200이 중국에 공급되면 연산 자원이 크게 확충돼 중국이 초대형 AI 모델을 선보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미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 등 중국의 주요 기업은 대규모 LLM 개발을 위한 GPU 확보전에서 미국 규제로 제약을 받아왔다. 그러나 H200 판매 재개로 기술 격차 해소의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중국이 AI 모델 수준을 글로벌 톱티어로 끌어올릴 경우 미국과 중국 중심의 ‘AI 양국 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그림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AI 스타트업들은 이러한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다시 GPU를 확보하게 되면 모델의 크기와 속도를 대폭 끌어올릴 수 있다”며 “AI 서비스 개발 경쟁에서 ‘미·중 양강 구도’가 고착화될 수 있어 국내 기업의 성장 공간이 좁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한국 반도체·AI 산업, 새로운 전략 필요
이번 결정은 단순한 수출 완화가 아니라 AI 반도체 시장 판도를 재편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자국 기술 기업의 시장 점유율 유지와 인플레이션 완화를 동시에 노리는 복합 전략을 취했고 중국은 개방된 틈새를 통해 AI 역량 강화의 기회를 잡으려는 계산이다. 한국은 그 중간에서 HBM 기술과 메모리 집적 역량을 무기로 한 안정적 공급자로 부상하고 있다.
H200 칩에는 고성능 메모리인 HBM3E가 탑재되기 때문에 엔비디아의 주요 협력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HBM의 판매 증가와 수주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향후 미국이 추가 규제 완화를 이어갈지 혹은 다시 규제 강도를 높일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이 재편되는 국면에서 한국은 단순한 부품 공급국을 넘어 AI 인프라의 핵심 기술 축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의 AI 수요가 고성능 GPU 확보로 다시 살아나면 AI 서버 투자가 정상화되어 고성능 메모리 주문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업계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의 위상을 새롭게 드러내는 계기”라며 “연산 칩과 메모리의 균형 성장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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