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배준철 기자]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면 통상 재무 전문가를 투입해 비용을 줄이고 현금흐름을 관리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롯데건설의 선택은 달랐다. 부동산 PF 리스크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롯데는 숫자만 들여다보는 관리자가 아닌, 땅의 가치와 사업의 본질을 꿰뚫는 '정통 개발 전문가' 오일근 대표이사를 선장으로 낙점했다. 이는 단순히 빚을 갚고 버티는 것을 넘어,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던 사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롯데건설을 단순 시공사에서 가치 창출형 종합 디벨로퍼로 탈바꿈시키려는 오일근 대표의 전략과 리더십을 분석한다.
■현장을 읽는 눈, 부동산 개발의 승부사
오일근 대표는 건설업계에서 30여 년 경력을 쌓으며 단순 시공 관리를 넘어 사업지 발굴, 기획, 금융 조달, 분양까지 부동산 개발의 전 과정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롯데그룹 내에서도 굵직한 개발 사업을 주도하며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의 등판은 시장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무분별한 수주 확장은 없다. 철저히 수익성이 검증된 사업만 한다." 재무 전문가가 리스크를 회피하는 데 주력한다면, 개발 전문가인 오 대표는 리스크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가치가 있는 곳에 과감히 베팅하거나, 가망 없는 곳을 가차 없이 도려내는 외과 수술식 경영을 구사한다. PF 위기를 겪은 롯데건설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옥석 가리기' 능력이었다. 오 대표는 취임 직후 "건물을 짓기 전에 가치를 먼저 설계하라"는 경영 철학을 천명하며 롯데건설의 근본적 체질 개선에 착수했다.
■양적 성장의 종언, 질적 디벨로퍼로
오일근 호(號)의 핵심 전략은 단순 도급형 시공사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과거 건설사들이 외형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수주했던 브릿지론 단계의 사업장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 PF 위기의 본질이었다. 오 대표는 수주 심의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입지, 분양성, 미래 가치 등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검증해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수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업계에서는 이를 '체리피킹(Cherry-picking)' 전략이라 부른다. 동시에 남이 시키는 건물만 짓는 낮은 마진 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해 롯데건설이 직접 토지를 매입하고 기획하는 자체 개발 사업 비중을 늘리고 있다. 리스크는 높지만 성공 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으로, 그의 개발 전문가 역량이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단순 시공 마진은 5~7%에 불과하지만, 자체 개발 사업은 20% 이상의 수익률도 가능합니다. 물론 리스크 관리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오 대표는 임직원 간담회에서 이같이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룹 시너지, 복합개발의 '마에스트로'
오 대표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바로 '롯데'라는 배경이다. 유통, 호텔, 물류 등 그룹 계열사들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과 콘텐츠를 건설과 결합할 때 폭발적인 시너지가 발생한다. 오 대표는 단순 아파트 건설을 넘어 주거, 상업, 문화가 어우러진 대형 복합단지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마이스(MICE) 복합단지 개발이 대표적 사례다. 이는 단순한 건설 기술을 넘어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 수익까지 창출해야 하는 고난도 영역으로, 오 대표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분야다. 재건축·재개발 시장에서도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다. 단순 브랜드 경쟁을 넘어 롯데만의 특화 설계와 조경, 커뮤니티 기획을 제안하며 수주 우위를 점하고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팔아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하이엔드 브랜드 '르엘(LE-EL)'의 가치 극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역세권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교통 인프라가 뒷받침되는 입지에 주거와 상업을 결합한 역세권 복합개발은 분양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전략이다.
■위기 관리의 정공법, 사업지 구조조정
PF 위기 해결 과정에서도 그의 개발자 DNA가 작동했다. 재무적 해법만 찾았다면 그룹 지원금으로 이자 막기에 급급했겠지만, 오 대표는 사업지별 사업성을 전면 재평가했다. 사업성이 떨어지는 지방 현장은 과감하게 시공권을 포기하거나 대주단과 협의해 사업 구조를 재조정했다. 반면 서울 및 수도권 핵심 요지는 책임준공을 확약하며 사업 속도를 높였다. 이는 현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이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금융 구조의 고도화도 추진 중이다. 개발 사업의 핵심은 금융이다. 오 대표는 단순 차입을 넘어 리츠(REITs)나 펀드를 활용한 다양한 금융 기법을 도입해 자금 조달 루트를 다변화하고 있다.
"손실이 확정된 사업장을 붙들고 있는 것은 비효율입니다.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집중할 곳에 자원을 몰아야 합니다."
오 대표의 이런 실용주의적 접근은 조직 내부에서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회와 과제의 균형
오일근 대표 앞에는 기회와 과제가 공존한다. 가장 큰 강점은 사업 타당성 분석 역량이다.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서 회사가 헛발질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안전판이다. 그룹 내 개발 사업을 조율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정무적 감각도 탁월하다는 평가다. 그러나 과제도 만만치 않다. 디벨로퍼로의 전환은 막대한 초기 자본이 필요하다. 재무 구조 개선 노력과 미래를 위한 투자 사이에서 정교한 줄타기가 요구된다. 또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공격적인 자체 개발 사업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공사비 급등과 지방 중심 미분양 적체는 여전히 수익성을 압박하는 요인이다. 해외 사업 확장도 경쟁사 대비 늦은 감이 있어 속도를 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건설의 정의를 다시 쓰다
오일근 대표가 이끄는 롯데건설은 지금 환골탈태 중이다. 그는 롯데건설을 단순히 '집 잘 짓는 회사'에서 공간의 가치를 창출하고 운영하여 지속적인 수익을 내는 '종합 부동산 기업'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지금 롯데건설의 변화는 단순한 위기 극복 과정이 아니다. 30년 후 롯데건설이 생존할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체질 개선의 시간이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처럼, PF 리스크라는 혹독한 시련은 롯데건설이 고부가가치 디벨로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흙먼지 날리는 현장과 치열한 숫자 싸움이 오가는 회의실을 모두 장악한 '천상 개발통' 오일근 대표. 그의 손끝에서 그려지고 있는 롯데건설의 청사진이 한국 건설업계에 어떤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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