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K-케어'의 시대다. 우리나라 '의료 관광'은 그야말로 활황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속 주인공의 피부 비결을 따라 하고, K-팝 아이돌이 다니는 숍을 찾아 한국을 방문하던 외국인의 발걸음이 이제는 성형외과와 대학병원 로비로 향하고 있다.
한류 콘텐츠와 K-뷰티의 인기가 한국 의료서비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면서, 성형·피부과뿐 아니라 암 치료, 장기 이식, 로봇 수술, 건강검진 등 의료 관광이 새로운 K-비즈니스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국제 이동이 재개된 뒤 한국을 찾는 외국인 환자 수가 다시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현실은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 반가운 변화는 동시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과연 이들을 제대로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가. 의료 기술과 장비, 시술 성과는 세계 최상위권이라 자신할 수 있지만, 외국인 환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여정'까지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료 서비스 디자인은 병원을 예쁘게 꾸미는 일이 아니다. 환자가 한국의 병원을 검색하는 순간부터, 예약·입국·이동·진료·입원·수술·회복, 그리고 치료 후 본국으로 돌아가 사후 관리를 받기까지의 모든 '환자 여정'(Patient Journey)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환자의 눈으로 보면 의료는 '시술·수술'만이 아니라,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이 병원과 이 의사를 믿어도 되는지'에 대한 수많은 작은 질문의 연속이다.
의료가 '치료 행위'에서 '이해받는 경험'으로 확장될 때 환자는 비로소 안심한다. 따라서 지금 한국 의료에 필요한 것은 기계적 번역이 아니라, 환자가 '나는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섬세한 배려의 설계다. 안내 표지판에 몇 개 언어를 더 붙이는 수준을 넘어, 예약 페이지, 문진표, 대기 공간, 회복실, 퇴원 설명, 온라인 경과 확인 시스템까지 '이 사람이 어떤 문화권의 누구인지'를 전제로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의료 서비스 디자인의 역할이며, K-케어가 지향해야 할 출발점이다.
◇ 중동 시장에서 다시 열리는 기회, 전환점으로서의 K-케어
최근 한국과 아랍에미리트(UAE) 간 정상회담을 계기로, 의료·바이오헬스 분야 협력이 다시 빠르게 이슈가 되고 있다. 양국은 UAE 의료제품 규제기관과 바이오헬스 전 분야에 걸친 포괄적 협력 MOU를 체결하며, 의약품·의료기기뿐 아니라 화장품, 디지털 헬스케어, AI 기반 의료 설루션까지 협력 범위를 넓혔다.
중동은 원래도 해외 의료 관광 수요가 높은 지역으로,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유럽·미국·아시아 주요 국가로 나가 치료받는 문화가 뿌리 깊다. 한국은 이미 암 치료·장기 이식, 척추·관절 수술, 성형·피부 미용 분야에서 중동 환자를 유치한 경험이 있으며, 일부 대형 병원은 아랍권 VIP를 위한 별도 센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과 중동의 의료 협력 역사는 직선적이지 않았다. 과거 정부 주도의 개척 시기에는 중동 환자의 방한 의료 수요가 꾸준히 증가했으나, 정권 변화와 정책 공백, 의료 관광 지원 정책의 일관성 부족으로 인해 한동안 성장세가 둔화한 시기가 있었다.
그 사이 중동 국가들은 유럽·미국·동남아로 눈길을 돌렸고, 싱가포르, 태국, 터키 등은 자국 의료를 '국가 브랜드'와 결합한 패키지 상품으로 선보이며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한국은 기술 경쟁력에 비해 '경험 설계' 측면에서 차별화된 강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MOU는 이런 흐름을 뒤집고 한국이 다시 기세를 되찾을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문이 다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동 환자를 비롯한 외국인 환자들이 한국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제 기술 수준의 향상만이 아니라, 전체 여정의 신뢰도와 편안함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환자 경험'(Patient Experience, PX)이라는 말은 이제 글로벌 의료 시장에서 중요한 화두다. 미국·유럽의 상위 병원은 이미 PX를 전담하는 부서와 전문가를 두고, 예약 단계부터 퇴원 후 설문까지 환자의 감정 곡선과 터치포인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PX 개념이 점차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친절 캠페인'이나 '인테리어 개선'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진짜 PX는 서비스 디자인과 데이터, IT 시스템, 인력 교육이 결합한 종합 설계 작업이다. 외국인 환자를 기준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환자가 자국에서 한국 병원을 '처음 검색하는 순간' 어떤 언어·채널·콘텐츠를 만나게 되는가.
둘째, 예약과 상담 과정은 현지 시간대·언어·문화에 맞게 설계되어 있는가.
셋째, 입국·픽업·숙소·병원 이동까지의 과정에서 환자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동선과 안내가 있는가.
넷째, 병원 내 안내, 문진, 설명, 동의서, 결제 시스템은 외국인에게 이해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흐름인가.
다섯째, 수술·시술 후 회복과정에서 동반자의 역할, 종교·문화적 요구(기도 시간, 음식 규정 등)는 어떻게 반영되는가.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귀국 후 경과 확인, 추가 상담, 문제 발생 시 대응은 어느 채널을 통해, 어느 언어로 이뤄지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이 모든 질문은 결국 '경험을 하나의 디자인으로 묶을 것인가, 아니면 기술과 시설만 강조한 채 각 단계가 따로 놀도록 둘 것인가'의 선택으로 귀결된다.
◇ K-케어, '완성품'이 아니라 '설계해야 할 프로젝트'
한국은 이미 K-콘텐츠와 K-뷰티를 통해 '한국식 미감과 디테일'이 세계 시장에서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의료 분야에서도 'K-케어'라는 이름으로, 진료·간호·돌봄·회복의 전 과정을 환자 경험 중심으로 재설계할 차례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병원·중개사·관광 업계가 함께 설계하는 통합 PX 모델이 필요하다. 또한 의료법과 관광법·출입국 정책이 어긋나지 않도록, 국가 차원의 의료 관광 가이드라인과 인증 제도를 PX 기준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여기에 문화와 언어, 종교적 다양성을 반영한 표준 환자 여정 시나리오 개발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동, 동남아, 북미, 유럽, 중국 등 주요 지역별 '페르소나'와 여정 지도를 만들고, 병원별로 적용할 수 있는 사용자 경험 가이드도 만들 필요가 있다.
병원마다 강제조항으로 넣어야 할 사안도 있다. 의료진과 스태프를 대상으로 한 PX 교육과 평가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친절 교육만이 아니라, '설명하는 기술', '다른 문화권 환자를 이해하는 법'을 커리큘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특유의 강점인 디지털 기반의 다국어 서비스 플랫폼도 정책 차원에서 구축할 필요가 있다. 예약·결제·동의서·사후 관리까지 하나의 앱·웹에서, 다국어로 투명한 정보와 함께 제공해야 한다.
결국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외국인 환자의 전체 경험을 하나의 디자인으로 설계할 준비가 돼 있는가.
K-컬처가 K-케어로 확장되느냐, 아니면 '기술은 좋은데 서비스는 아쉽다'는 평가에 머무느냐는 지금부터 우리가 환자 경험을 어떤 시선과 기준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K-케어는 이미 완성된 브랜드가 아니라, 이제 막 설계에 들어가야 할 한국 사회의 다음 프로젝트다.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기업 (주) 카우치포테이토 대표.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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