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변화하는 발레리나 머물러 있지 않은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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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변화하는 발레리나 머물러 있지 않은 예술가

이데일리 2025-12-10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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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따뜻함을 전해온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김주원 부산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은 15년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활약한 발레계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2006년에는 전 세계 최고 권위를 지닌 ‘브누아 드 라당스’에서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예술감독으로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전 어릴 때 금쪽이었어요. 유연성도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춤추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는 선생님 칭찬에 러시아로 향하는 짐을 꾸렸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발레무용가이자 부산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인 김주원(48) 씨는 운명처럼 만난 발레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어릴 땐 여느 아이들처럼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재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수업 중에 벽을 보고 앉아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금쪽같은 내 새끼’였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지역 소년체전 육상 경기에 나가 고학년들 사이에서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김 감독은 “어릴 때부터 몸이 날랬어요. 한번은 갑자기 달려드는 택시에 뛰어올라 큰 사고를 면하기도 했죠”라고 회상했다

김 감독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주니어 발레단인 ‘새싹발레단’에 입단하면서부터다. 요즘은 4~5세 때부터 영재발레를 시작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늦은 출발이다. 하지만 그녀는 발레의 매력에 단번에 사로잡혀 발레에 인생을 걸었다.

“사실 제 목과 허리는 충격이 잘 흡수하지 못하는 체형이라 뛸 때마다 온몸에 통증이 쌓여요. 골반도 말려 있어 턴 아웃도 어려운 구조에요. 발도 도끼 발이라 무리를 해서 토슈즈에 맞췄죠. 그런 절실함이 절 여기까지 이끈 거 같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아닌 노력과 인내로 탄생한 발레리나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발레 영재인 줄 알았다.

△발레 전공자치고는 시작이 늦은 편이었다. 대개는 뼈가 아주 굳기 전인 7세 무렵 시작하고 늦어도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시작해야 좋은 발레리나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시작이 늦었지만 운이 좋게 새싹발레단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발레를 배우면서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배울수록 신이 났다. 그래서였는지 시작 1년 만에 나간 발레콩쿠르에서 동상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금상을 받았다.

-볼쇼이 발레학교는 어떻게 가게 됐나.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난 건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한양대에서 진행된 발레 방학 특강에 참여한 친구를 따라서 수업에 들어갔다가 볼쇼이 발레학교의 갈리나 쿠즈네초바 선생님을 만났다. 볼쇼이 발레단 출신의 프리마 발레리나이자 수많은 발레리나를 길러 낸 교육자였다. 그분이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괜찮으니 함께 러시아로 가자고 제안했다. 좋은 발레리나가 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당시 구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부모님이 반대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중학교 3학년 1학기에 학교를 자퇴했다. 반년 동안 부모님을 졸라 결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결정이 쉽지 않았을 거 같다.

△러시아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그래서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했다. 함께 러시아에 가보시고는 혼자서 잘해낼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혼자 해내야 했다. 볼쇼이는 어릴 때부터 내 꿈이었다. 하지만 생활은 혹독했다. 소련의 잔재가 남았던 때여서 방문도 화장실 문도 잠그지 못하게 했다. 기숙사에 300명이 생활하는데 전화기는 딱 한대뿐이었다. 한국에서 소포를 보내면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 수준은 최고였다. 발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은 전문 발레리나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발레 수업은 당연히 완벽하게 이뤄졌고 더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수업이었다. 음악성 함양을 위해 피아노와 같은 음악 수업을 꼭 해야 했다. 여러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 각국 민속춤(헝가리 안무, 집시춤 등)도 배웠다. 파드되(듀엣), 작품, 무대 연습 수업도 있었고, 공연도 수업의 일환이었다. 역사, 수학 등 예술가로서의 정서를 키우는 데 필요한 수업들도 있었다. 발레리나가 갖춰야 할 예술적 소양, 철학, 감각, 마음가짐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은 발레를 종합 예술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김주원 부산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의 어릴 때부터 꿈은 ‘변화하는 발레리나, 머물러 있지 않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도 그녀는 꿈을 향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중이라고 밝혔다.(사진=김태형 기자)


-수업은 스파르타식이었나.

△혹독하지 않지만 연습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한국의 예술중·고도 좋은 무용수를 길러 내는 시스템을 갖췄지만 발레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운 할 수 없는 구조였다. 볼쇼이발레학교는 하루 종일 진행하는 모든 수업을 발레리나 만들기에 집중한다. 10세부터 18세까지 다니는데 입학 전에 1년 정도 예비학교가 있다. 해외 유명 발레단에는 모두 학교가 있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훌륭한 무용가를 양성할 수 있다.

-학내 경쟁이 치열했을 거 같다.

△1~8학년의 학사과정 중 4학년으로 들어갔다. 한 학년에 3개 반이 있고 한 반에 15명 정도가 함께 공부한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람이 줄어든다.

입학부터 어려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실기 시험, 피아노시험을 본다. 기준에 미달하면 떨어진다. 매년 학생 수가 줄었고 1학년 때 학생들로 가득했던 교실은 졸업 즈음이 되면 3분의 2 정도만 남는다. 부상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발레를 그만두는 일도 있고 체형이 변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졸업 때까지 남은 내 동기는 10명 정도였다. 이 중에 외국인은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1998년 국립발레단에 수석무용수로 입단했다.

△학교를 졸업하는 18세에는 프로발레단에 들어가야 하는 구조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발레단에 가면 늦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18세부터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오자마자 수석무용수였다. 당시에는 수석무용수가 3~4명 정도였다.

-201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5년 수석무용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결이 있나 모르겠다.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한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그 과정들이 내 삶이었다. 가족들의 생일에도 다음 날 컨디션을 생각해 15년간 안 갔던 것 같다. 지금도 예술의전당 근처만 가면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하루 종일 리허설을 하고 예술가들과 작업할 생각에 너무 신이 나서다. 15년 동안 그 설렘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다.

-큰 부상도 있었다.

△두세 번 정도다. 춤추지 말라는 사형선고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미친 듯이 재활해서 다시 춤을 추고 있더라. 족저근막염과 건초염이 와서 아침에 발을 못 디딜 정도로 아팠다. 그 통증이 허리까지 와서 쓰러지기도 했다. 7~8개월 정도 쉬어야 한다는 진단에 사표를 쓰려 했다. 당시 단장님이 말려 휴직계를 내고 온종일 재활에 매달렸다. 사실 난 발레리나로서 좋은 신체조건이 아니다. 없는 아치를 만들고 뼈와 근육을 단련하다 보니 몸이 엉망이 됐다. 2017년에는 디스크가 터져 한 달 정도 병원에서 누워 생활하기도 했다. 코어 운동을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씩 하면서 재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게 쉽지 않은 게 평생 한 후에는 지긋지긋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단하다.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하는 ‘브누아 드 라당스상’을 수상했다.

△그 해에 전 세계에서 공연된 작품과 무용수를 대상으로 심사하는데 ‘해적’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다. 국립발레단 단원이 출연했고 코리아심포니와 함께했다. 트레이너부터 무용수, 의상까지 전부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한국 발레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수상 후 외국에서 초청이 많아졌다. 폴란드나 일본 등 초청 공연에서 마음에 태극기를 꽂고 춤춘다는 마음으로 공연했다.

-발레를 계속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포기가 아니고 못한 거 아닐까?(웃음) 옛 남자친구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다. 당시엔 결혼 계획 대신 1~2년 후까지 출연할 작품 스케줄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면 그 사람의 꿈도 응원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옆에 있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별했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을 위해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하는 걸 포기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만큼 무용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두 가지를 현명하게 잘 해내는 후배나 동료도 있다. 그런데 난 하나에 빠지면 다른 게 안 보인다. 만약 둘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지 않았을까. 곧 있으면 쉰 살이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겸손까지 갖췄다. 발레리나로는 고령인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비결은.

△최고령 발레리나다(웃음). 사실 디스크 부상 등으로 클래식 무대에는 서지 못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의 움직임을 사랑하는 안무가들의 요청이 있을 때면 무대에 서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몸 관리를 굉장히 열심히 한다. 하루 3시간 이상 운동하고 일주일에 5번은 2시간 이상 걷는다. 아침저녁으로 반신욕도 꼭 한다. 그런데 요즘은 후배들의 무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는 횟수를 줄이고 있다.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고 객석에서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다.

-뮤지컬을 비롯해 다른 분야의 활동도 많다.

△그동안 연극도 2편 했고 음악가들과도 상당히 많이 작업했다. 발레는 종합예술이다보니 그림, 문학,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스스로도 모든 분야에 관심이 많다. 나의 모든 감각은 열려 있고 깨어 있다. 죽을 때까지 모든 분야에서 도전을 이어가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발레 외의 영역으로도 확장 중이다. 공연을 위해 협찬사를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모든 예술가를 PD처럼 섭외하는 일을 해보기도 했다. 작곡에도 참여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산의 흐름까지 파악하게 됐다(웃음). 아동 복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사이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쳤다. 아이들을 위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고 싶다.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 대한민국발레축제 대표 겸 예술감독, 서울사이버대 부학장 등을 겸직하고 있다. 어떻게 다 소화하고 있나.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과 대한민국 발레축제 대표 겸 예술감독은 비상임으로 맡고 있다. 시즌이 달라 겸임이 가능하다. 특히 대한민국발레축제는 올해로 15년 된 행사인데 1회 때부터 참여하고 있어 애정이 남다르다. 이 축제를 통해 성장, 발굴된 안무가나 무용가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제정사업에서 공모사업으로 바뀌어 단장으로서 신경 쓸게 많아졌다. 정부 지원금은 3억 6000만원 정도고 나머지는 후원으로 채워야 한다. 지원과 후원이 안정적으로 이뤄지면 좋겠다.

-우리나라 발레가 더욱 발전하려면 어떤 여건의 조성이 필요할까.

△국립발레단이라는 최고의 울타리 안에도 있었지만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곳’에서도 일하고 있다. 이제 예술감독을 맡은 지 2년 정도 되어간다. 기초예술과 순수예술에 대해 정부나 민간영역에서도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음악은 다양한 지원이 있지만, 무용, 특히 발레는 그렇지 않다. 발레계 전체가 성장하려면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문화와 연결된 재단 등에서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무용수들의 고용이 불안한 경우가 많다. ‘시즌 단원’이거나 공연 별로 수개월 단기 계약을 반복하는 ‘프로젝트 단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 노조의 요구가 커지며 후배 고용에 제약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노조는 필요하지만 이 때문에 후배들의 일자리 창출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게 안타깝다. 서로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김주원 예술감독이 예종석 대기자와 대담을 나누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후진들에게 들려주고 이야기는.

△발레를 꿈꾸는 꿈나무들에게 “행복하게 춤추세요”라는 말을 한다. 내 삶을 발레에 오롯이 바쳤고, 또 애증의 관계처럼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 뭘 그렇게 치열했나 싶을 정도였다. 정서적으로 예민한 예술가들이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 춤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연하지 않고 토슈즈 신기에 적합한 발도 아니었지만, 춤추는 게 너무 예쁘다는 이야기에, 절실함과 열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후배들은 행복한 춤을 췄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바람이다.

■김주원 예술감독 △1977년 부산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졸업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러시아 브누아 드 라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 △현 대한민국발레축제 대표 겸 예술감독 △현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 △현 서울사이버대학교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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