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도 이재명 정부 첫 정기국회 회기 마지막 날인 9일, 국회 본회의장이 여야 간 극한 대치로 사상 초유의 혼란에 빠졌다.
이날 여야는 내란전담재판부법 등 8개 법안은 상정조차 불발됐고, 62개 안건 중 국가보증 동의안 3건만 합의 처리된 채 나머지 59개 법안 전체에 대해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는 초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한토론이 진행되는 도중 우원식 국회의장이 회의를 중단시키는 전례 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내란재판부 설치, 법 왜곡죄 도입, 필리버스터 축소 개정 등 이른바 '8대 악법'을 저지하겠다는 전략이다.
국민의힘이 진행하는 필리버스터는 이날이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만큼 오늘(9일) 밤 12시를 기해 자동 종료된다. 가맹사업법을 포함한 59건의 법안은 오는 11일 예상되는 12월 임시국회에서 민주당 주도로 순차 표결할 전망이다.
"내란 정당" "계엄은 왜"…본회의장 순식간에 아수라장
첫 토론자로 나선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가맹사업법 개정안을 놓고 단상에 올랐다.
나 의원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을 시작하자 마자 민주당 의원들이 자리를 뜨려 했고, 국민의힘 측에서 "어딜 가냐"며 제지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내란 정당", "계엄은 왜 했나"라는 야유를 퍼부었고 본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는 "패스트트랙으로 정무위를 건너뛴 법안"이라고 지적한 뒤 민주당을 향해 "입법 내란 세력의 독재"라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의장에게 인사도 없이 연단에 오른 데다 법안과 무관한 '민주주의 일반론'을 펼치자 우 의장이 제동을 걸었다.
우원식, 나경원 마이크 차단…"무제한은 시간이지 주제 아냐"
우 의장은 "안건과 관계없는 발언으로 회의를 방해한다"며 나 의원의 마이크의 전원을 내렸다.
나 의원이 "국회법상 무제한토론을 의장 마음대로 막을 수 없다"고 항의하자, 우 의장은 "무제한은 시간이지 주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의원석에서는 "(필리버스터는)제한토론이 아니라 무제한토론"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의원 의석 단말기에는 '국민 입틀막 3대 악법'이라는 문구가 걸렸고,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입틀막"이라고 응수했다.
양측에서는 우 의장과 추미애 법사위원장을 합친 "우미애", 나 의원과 패스트트랙 사건을 엮은 "나빠루" 같은 조롱 섞인 발언까지 나왔다.
휴대용 마이크 동원에 우 의장 "사과하라"…유감표명 공방
마이크가 꺼진 상태에서도 나 의원이 발언을 계속하자 국민의힘 측이 휴대용 마이크를 꺼내들었다.
우 의장은 "무선 마이크까지 동원하는 건 과하다.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여야 지도부가 의장석에 모여 1시간가량 조율 끝에 마이크를 다시 켰지만 충돌은 멈추지 않았다.
우 의장이 "무선 마이크를 사용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라"고 압박하자 나 의원은 "의장이 편파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유감을 표한다"며 오히려 되받았다.
결국 오후 6시 19분, 우 의장은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하다"며 정회를 선포했다. 무제한토론 도중 의장이 회의를 중단시킨 전례 없는 일이었다.
송언석 "의장 마이크 차단·정회는 폭거…법적 조치 검토"
정회 직후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긴급 입장을 내고 "우원식 의장이 상식에도 어긋나고 전례에도 없는 매우 황당한 본회의 진행을 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송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는 국회법상 '다른 규정에 불구하고'라는 조항이 있어 내용에 대한 제한이 없다"며 "의장이 임의로 의제 내외를 판단해 마이크를 차단한 것은 의장 스스로 본회의 진행을 방해한 폭거"라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국회법은 무제한토론 종결까지 본회의를 산회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의장이 임의로 정회를 선언한 것은 향후 모든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참담하다"고 지적했다.
송 원내대표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코로나19 당시 정회 선례'에 대해서도 "당시는 국가비상사태였고 양당 원내대표 협의를 거쳤으며 발언자가 토론을 마친 뒤 정회했다"며 "오늘은 비상사태도 없고 사전 협의도 없이 발언 중 일방적으로 정회한 것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의장이 정회를 자정까지 끌어 자동 산회되도록 유도하려는 것 아니냐"며 "의장의 국회법 위반 행위에 대해 법적 조치가 가능한지 검토하고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국민의힘 원내대표실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2016년 김경협 의원의 의제 외 발언 관련 '어떤 것이 의제 내이고 어떤 것이 의제 외인지 구체적으로 식별하는 규칙이나 법 조항은 없다'며 발언을 허용한 선례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송언석 "8대 악법 실체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법안 전부 필리버스터 했다"
앞서 이날 오전 송 원내대표는 "사법파괴 5대 악법과 국민 입틀막 3대 악법의 강행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내란재판부, 법 왜곡죄, 대법관 증원, 4심제, 슈퍼공수처 등을 열거하고 "사법부 장악을 위한 전체주의 체제 구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의원총회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맹사업법은 우리 당 다수가 찬성하는 내용"이라면서도 "8대 악법의 실체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법안 전부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정청래 "민생법안 필리버스터는 민생탄압·민생쿠데타"
본회의 직전인 오후 3시 50분, 더불어민주당은 로텐더홀에서 '민생법안 발목잡는 국민의힘 규탄대회'를 열고 국민의힘의 전면 필리버스터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 3년 동안 야당 탄압, 정적 제거, 이재명 죽이기에 골몰했던 내란 세력은 단 한마디 반성도 없다"며 "12.3 비상계엄 1년이 지났건만 반성과 성찰 없이 지금도 마구잡이 윤어게인을 외치고 있다"고 질타했다.
정 대표는 "민생법안에 대해서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해괴망측하고 기상천외한 국민의힘을 국민 여러분 용서하지 마십시오"라며 "민생 발목 잡기를 넘어서 이것은 민생탄압이고 민생쿠데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늘 통과시켜야 될 민생법안에 모두 필리버스터를 걸겠다는 국민의힘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맞느냐"며 "민생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의힘을 준엄하게 규탄한다"고 강조했다.
김병기 "민생 볼모 잡는 정치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 뿐"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도 "민생 인질극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며 "개혁을 막겠다며 민생법안 수십 건을 볼모로 잡았다"고 비판했다.
김 원내대표는 "국회 기능을 고의로 중단시키고 그 피해를 국민에게 전가하는 최악의 구태 정치"라며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국가와 국민의 삶까지 위험에 밀어 놓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는 "민주당은 개혁법안은 개혁법안대로 민생법안은 민생법안대로 제때 처리하겠다"며 "민생을 지키는 데 단 한 걸음의 후퇴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 원내대표는 "민생을 볼모로 잡는 정치로 얻을 수 있는 건 국민의 불신과 분노 그리고 준엄한 심판뿐"이라며 "오늘 이 시간부로 국회 정상화와 민생 개혁 완수를 위한 비상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실화해위·제헌절 법안 등 비쟁점 법안 다수 미처리
이날 본회의에는 진실화해위 3기 출범 관련 과거사정리법, 제헌절 공휴일 지정 법안 등 비쟁점 법안 다수가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양당은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은 임시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국회법상 필리버스터는 회기 종료와 동시에 자동 종료되므로, 이날 시작된 무제한토론은 자정에 끝난다. 민주당은 10일 개회하는 임시국회에서 11일부터 본회의를 열어 사법개혁 법안 처리를 강행할 방침이다.
11일 가맹사업법 표결 전망…형소법 먼저, 내란재판부법은 21일 이후
11일 본회의에서는 이날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는 가맹사업법 개정안 표결이 가장 먼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사법개혁 법안 중에서는 하급심 판결문 공개 확대를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 반인권 국가범죄 공소시효 배제 특례법 등 논란이 상대적으로 덜한 법안들이 우선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에서도 위헌 논란이 제기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은 추가 검토를 거쳐 21일 이후 본회의에 상정하는 방안을 민주당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폴리뉴스 박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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