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흰여우·흰바람벽·흰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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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흰여우·흰바람벽·흰별 기다리며

경기일보 2025-12-09 19:11: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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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첫눈이 내린 숲으로 들어간다. 인기척이 드문 이른 아침 나무에서 내려온 청설모가 눈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후다닥 가지 위로 달아난다. 장애물 건너뛰기 주자처럼 가지와 가지를 점프할 때마다 눈송이가 쏟아진다.

 

바람에 날리는 눈들의 오묘한 춤사위에 넋을 놓고 있자니 ‘비디오 아트’로 예술 지형을 바꾼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지인들에게 한 말씀이 떠오른다. ‘예술은 눈 속으로 숨어버린 흰여우의 꼬리’다. 흰 꼬리를 쫓아 평생을 헤맸으나 눈으로 가득 덮인 숲에서 그 꼬리는 흔적조차 없다. 어쩌면 허무하기도 하고 허탈스럽기도 할 이 길의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대가의 겸허한 자기 고백 같기도 하고, 끝없는 길을 향해 나선 자의 샘솟는 창조력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신념이 묻어나는 말 같기도 하다.

 

쓰고 나면 지워지는 저 백색의 공간을 거울처럼 갈고 닦으며 사는 자에겐 대표작이 늘 미래에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이룬 성과는 모래성과 같아 해변의 파도에게 내줘야 한다. 성을 지키려 하기보다 성을 무너뜨리는 쾌락 속에 있을 때 모든 시간은 모험을 잃지 않는 신생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따듯한 집과 안락한 난롯가를 떠나 흰여우가 사는 겨울 숲의 강풍한설을 일상처럼 겪으며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석이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노래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과 고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을 드높은 정신의 영토에 대한 지향 가운데 오롯해지는 순백의 위의로 전환하는 일은 일생을 바칠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연말이라 문학장 내에도 시상식 자리가 잦다. 오랜만에 조우한 출판사 에디터들과 문학담당 기자들 그리고 작가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젊은 여성이 부러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한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담양 한빛고등학교에 특강 오셨을 때 뵀어요. 그때 사인해주신 시집을 아직 갖고 있답니다.”

 

희미하게 지워진 기억 속에서 번개가 쳤다. 작가가 되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히던 문학소녀가 정말 한국 문학의 가장 뜨거운 중심이 돼 나타난 것이다. 2022년 등단 이후 2023년 젊은작가상, 2024년 문지문학상 그리고 올해의 제31회 문학동네 소설상까지 거머쥔 함윤이 작가였다. 문학전문 출판사 ‘무제’의 대표이자 영화배우인 박정민이 특유의 예감으로 주목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였다.

 

경이로운 결실도 결실이지만 그 오랜 세월 청소년 시절의 꿈을 놓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어왔다는 그 사실이 내겐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등단 과정에 겪었을 참담함과 시련은 말해 무엇하랴. 중학교 3학년 때 첫 신춘문예 응모를 하고 무려 12년 동안 낙방거사로 살다 당선된 나로선 그 고난의 행군이 일종의 전우애처럼 스쳐간다. 위계화된 제도의 질서를 뚫고 첫 책을 내기까지의 역경은 또 얼마나 녹록잖았을 것인가. 그 기나긴 여정 끝에 다시 만난 함윤이 작가의 눈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날의 감동을 특강을 간 여러 학교에서 문학을 꿈꾸는 학생들과 함께 나눴다. 11월의 끝에 단재고등학교에서 만난 A군은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자작 단편소설 한 편을 선물로 줬다. 다음에 만날 때는 출간한 창작집을 들고 나타나겠다는 약속을 하며.

 

A군을 만나고 오던 날 청소년 시절의 내가 겹쳐졌다. 소설을 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가 전상국 선생에게 혹평을 듣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아찔한 절벽 앞에 선 듯 위태롭던 그 겨울의 별은 왜 그렇게 눈물겨웠을까. 자작나무 수피처럼 갈라 터져 빛나는 별 앞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겨울은 별을 보기 좋은 계절이다. 쌀쌀할수록 잘 씻긴 쌀알처럼 별의 선도가 선명해진다. 여느 계절엔 볼 수 없는 별들이 영하를 고배율 렌즈 삼아 떠오르기도 한다. 눈 내린 숲 너머로 흰여우 같기도 하고 흰 바람벽 같기도 한 별이 반짝이고 있다. 문학의 미래는 저렇게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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