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들썩이고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말이다.
힘겨운 이웃에게 전해지는 온정은 사회를 지탱하는 빛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에도 때아닌 '산타클로스'가 등장했다.
정부는 "어려운 서민을 돕겠다"며 연체 기록을 지워주고 이자를 깎아주는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겉보기엔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지만 보따리를 열어보니 실상은 달랐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가 독버섯처럼 피어났고 약속을 지킨 성실 상환자들은 역차별의 박탈감에 시달린다.
<뉴스락>뉴스락>은 연말을 맞아 정부의 무분별한 빚 탕감 정책이 남긴 '독이 든 선물'의 실태를 진단한다.
"지워주면 또 빌리고"…'밑 빠진 독' 된 신용사면
정부가 서민·소상공인의 재기를 돕겠다며 대대적인 '신용사면'을 단행했지만, 혜택을 받은 차주 3명 중 1명이 다시 연체의 늪에 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빚을 갚으려는 의지나 상환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무조건적으로 기록을 지워준 '묻지마 사면'이 도덕적 해이만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지난 9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실이 NICE평가정보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신용사면을 받은 286만 7964명 중 33.3%에 달하는 95만 5559명이 다시 연체 기록을 남긴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산타'를 자처하며 연체라는 주홍글씨를 지워줬지만 결과적으로 수혜자의 상당수가 1년도 안 돼 다시 빚더미에 앉은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사면 직후 금융권에서 막대한 자금을 다시 끌어다 썼다는 점이다.
재연체자들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7월까지 금융권에서 총 38조 3249억원을 대출받았다.
특히 이 자금의 88%는 사면 전에는 대출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1·2금융권에서 실행됐다.
정부의 보증을 믿고 돈을 빌려준 금융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재연체자들이 빌린 자금 중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74%에 해당하는 28조 5160억원이 이미 연체 상태다.
1인당 평균 연체금액만 4283만원에 달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추가적인 빚 탕감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말까지 5000만원 이하 채무자 324만명에 대해 빚을 전액 상환하면 연체 기록을 삭제해 줄 방침이다.
이는 지난해 신용사면 당시 채무 한도(2000만원)보다 2.5배나 높고 사면 규모 면에서도 역대 최대 수준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신용사면 후 대출을 받고 다시 나 몰라라 연체하는 악순환은 금융사의 건전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높아진 연체율 비용을 성실 상환자들의 금리 인상으로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꼬집었다.
"성실하면 바보?"…신용 1등급이 이자 더 내는 기현상
"금융이 너무 잔인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월 저신용자 고금리 상황을 두고 한 발언이다.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금융시장의 가격 결정 원리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신용이 낮아 돈 떼일 확률이 높은 사람에게는 낮은 이자를 받고, 꼬박꼬박 빚을 갚아온 고신용자에게는 더 높은 이자를 받는 ‘금리 역전’ 현상이 현실화된 것이다.
은행연합회 소비자포털에 따르면 지난 9월 하나은행이 취급한 마이너스통장(신용한도대출)의 경우 신용점수 600점 이하인 최저 신용자의 평균 금리는 3.46%였다.
반면 신용점수 951점 이상의 최고 신용등급 차주는 이보다 1%포인트 이상 높은 4.54%의 금리를 적용받았다.
다른 은행 또한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은행의 저신용자(600점 이하) 금리는 4.77%로 고신용자(900~950점) 금리 4.88%보다 낮았고, BNK부산은행은 저신용자에게 4.11%를 적용한 반면 고신용자에게는 5.11%를 부과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금융의 기본 공식이 깨진 배경에는 정부의 강력한 '포용금융' 드라이브가 있다.
5대 금융지주는 향후 5년간 508조원을 상생금융 등에 투입하기로 했는데, 이 중 67조~72조원가량이 저신용자 지원 등 포용금융에 할당됐다.
하지만 이러한 '금리 착시' 뒤에는 씁쓸한 현실이 숨겨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치상으로는 저신용자 금리가 낮아 보이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이들을 위한 대출 문턱이 아예 봉쇄돼 있다는 것이다.
보여주기식 정책이 만들어낸 '희망 고문'이자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뉴스락>과의 통화에서 "저신용자(신용점수 600점 미만)의 금리가 정책에 의해 낮아 보이긴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신규 대출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고신용자들이 수치만 보고 역차별이라며 분노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출 자체가 안 나가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아 이 상황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은행 팔을 비틀어 만든 '산타의 선물'은 고신용자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저신용자에게는 실질적인 혜택 없는 헛된 희망만을 주고 있는 셈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신용자들은 연체 위험이 커 가산금리가 높게 형성되는 것이 시장 논리"라며 "정부 주도의 금리 우대는 빚을 잘 갚는 고신용자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빚 갚지 마세요"…산타 흉내 정책에 기생하는 브로커들
"불법 도박 빚도 탕감받고 인생 리셋하세요."
"추심 압박 버티며 원금 탕감 기다리세요."
정부가 대규모 빚 탕감 정책을 쏟아내자, 이를 악용해 돈을 벌려는 '배드뱅크 브로커'들이 활개치고 있다.
유튜브와 SNS 등에는 정부의 채무조정 제도를 이용해 돈을 갚지 않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광고가 넘쳐난다.
정부는 현재 '새출발기금'(새도약기금)을 통해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 채무 16조 4000억원을 2026년부터 순차적으로 탕감해 주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원칙적으로 도박이나 유흥으로 인한 채무는 탕감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걸러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정정훈 캠코 사장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금융기관으로부터 부실채권을 일괄 매입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빚이 도박 자금인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시인했다.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밝히지 않는 이상 세금으로 도박 빚까지 갚아주게 생긴 꼴이다.
브로커들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대출중개인이나 대부업체와 결탁한 이들은 채무자들에게 "정부가 빚을 탕감해 줄 테니 지금 갚지 말고 버티라"고 부추기며 수수료를 챙긴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의 확산은 지표로도 확인된다.
2023년 말 2.4%였던 카드대출 연체율은 올해 8월 말 3.3%로 치솟았고, 인터넷전문은행의 2030 청년층 연체율 역시 급증세다.
카카오뱅크의 30대 이하 연체율은 2022년 말 0.9%에서 올해 7월 1.5%로 뛰었다.
전문가들은 '관치금융'이 낳은 시장 왜곡이 임계점을 넘었다고 경고한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빚을 없애주는 '선물'은 당장은 달콤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용은 결국 국채 발행 증가와 금리 상승으로 이어져 미래 세대와 성실 납세자들에게 '빚 청구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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