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국회 세미나에서 미국선급협회(ABS)가 해양 소형모듈원전(SMR) 시대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정면에 내세웠다. ABS는 “우리는 최근에 이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예전에 이미 해본 적이 있다”는 선언을 했다. 1960년대 핵추진 상선 ‘새배너’를 설계·검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운·원전·조선이 얽힌 새로운 규범과 시장을 다시 만들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ABS 발표의 배경은 국제해사기구(IMO)가 2050년 넷제로(Net Zero)를 목표로 삼으면서 촉발된 해운 탈탄소 압박이다. ABS는 이날 해운을 둘러싼 세 가지 축을 제시했다. 첫째는 환경규제·안전규정을 포함한 산업 내부 규범이고, 둘째는 에너지·원자재 운송 인프라로서의 세계 공급망, 셋째는 미국 조선 역량과 군사·물류 관점에서의 국가안보다.
이 구조 위에 ABS가 올려놓은 해법이 핵과 LNG다. ABS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제 상선대에서 핵 추진 상선은 0척이다. 핵 상선을 위한 국제적으로 인정된 규칙은 하나뿐이며, 그것도 오래됐다. 2050 에너지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화석연료 비중이 급감하는 반면, LNG·저탄소 연료, 그리고 원자력이 에너지 안보의 핵심 축으로 전환되는 그림이다. ABS는 “IMO 결정 이후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 압력이 겹치면서, 핵은 다른 연료보다 빠르게 채택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ABS는 규범 측면에서 세 가지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첫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ATLAS(국제원자력기구가 주도하는 해상 원자력 추진 기술 및 선박 적용을 위한 국제 규제·안전 프레임워크 구축 프로젝트)다. ATLAS는 해상 원자로 국제 인허가 모델이며, 각국 규제기관과 선급이 함께 “해양용 원자로 안전기준”을 작성하는 구조다.
둘째, IMO의 핵 상선 안전 코드(Resolution A.491 XII)다.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SOLAS) 8장 보완 규칙으로, 가압경수형 원자로 탑재 상선의 방사선 보호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 1981년 도입 이후 개정이 늦어 기술 발전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ABS의 진단이다.
셋째, ABS의 자체 규칙이다. 1962년 제정된 ‘핵 선박 분류 규칙’은 새배너 검사·인증에 적용됐다. 선체는 기존 강선 규칙을 따르되, 격납용기·계측·제어 등 핵 설비 항목을 별도로 다뤘다. 현재는 ‘퇴역(retired)’ 상태지만, ABS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규칙 작성을 시사했다.
ABS가 이번 발표에서 강조한 것은 ‘경계선(Interface)’이다. 원자로·핵연료 인허가는 각국 원자력 규제기관 영역이고, ABS는 선박·바지선·플랜트 구조와 운항·정비 등 ‘해양 인터페이스’를 담당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발표 슬라이드에는 기국정부(flag state), 항만 당국(Coastal State), 국가 원자력 규제기관, 선급(Class Society)가 동시에 나열됐다.
그 사이를 잇는 기술 합의서(Interface Document)가 등장한다. 원자로 격실, 제어실, 비상발전기, 냉각라인, 차폐 구조가 어떤 책임 아래 설계·검사·운영되는지를 명문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규칙이 아니라 ‘책임 경계선(Interface)’이 해양 SMR 규제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ABS는 ‘Nuclear Maritime Market’에서 항만·산업단지·해상 데이터센터까지 하나의 시장 그림으로 엮었다. 육상의 기존·차세대 원전에서 생산한 전력으로 수소·암모니아·합성연료를 생산하는 플랜트, 항만 전력망, 부유식 원전, 핵추진 상선, 해상 산업단지 전력 공급망이 하나의 가치사슬로 이어진다.
이는 해양 원자력이 수송 연료가 아니라 전력 인프라가 된다는 구상이다. 실제 연구 중인 선박 개념도도 나왔다. ABS는 1만4000TEU 컨테이너선, 수에즈막스급 유조선, LNG운반선, 부유식 원전 바지, 데이터센터 바지까지 다섯 플랫폼의 개념 설계를 제시했다. 각 설계에는 고온가스로(HTGR), 소형고속로(LFR), 마이크로 원자로의 출력, 선체 크기, 설계 흘수·속력이 기재돼 있다. 내부 단면에서는 원자로 격실–증기발생기–추진 모터–냉각계통–차폐 구조가 배치되는 방식까지 공개됐다.
ABS는 DOE 프로젝트, EMSA 연구, C-Seaborg CMSR, 삼성중공업(SHI) 개념선 승인(AIP), HD한국조선해양의 부유식 원전 바지 AIP 등 공동연구(JIP)·개발(JDP)을 나열했다. 이어 IAEA·WNTI·NEMO, 텍사스 A&M·MIT·미시간대 등과의 파트너십도 소개했다. ABS는 훈련, 공동 프로젝트, 비즈니스 모델, 자문 서비스까지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 선급의 역할을 ‘규칙 작성자’에서 ‘생태계 설계자’로 확장하겠다는 의미다.
ABS 발표의 핵심은 “해양 SMR은 ‘표준 경쟁’이며, 기술이 아니라 규칙을 쥔 쪽이 시장을 만든다”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이 선언을 왜 한국 국회에서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 질문의 답은 실제 산업 구조에 있다. 전 세계에서 해양 SMR의 모든 밸류체인을 동시에 가진 국가는 거의 없다. 해양 SMR은 네 가지 체계가 ‘한 국가 안에서’ 결합해야 작동한다.
①원전 기술: SMR 설계·연료·안전해석 ②조선 기술: 대형 선체 건조·선급 기준 충족 능력 ③해양 플랜트 기술: FPSO·부유식 플랜트 경험 ④선급·규제 협업 경험: IMO·IAEA 채널 동시 대응 현실적으로 이 네 개를 모두 보유한 국가는 한국, 미국 정도뿐이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 인프라가 약화돼 있다는 점을 ABS 스스로 언급했다. 미 해군도 FNPP 건조를 외부 조선소에 맡기는 구조이며, 상업선 건조는 한국·중국·일본 중심으로 이동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능력과 상업용 원전 기술, 해양플랜트 건조 경험, 선급(KR) 역량, IMO 활동 경험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의 CMSR AIP 승인, HD한국조선해양의 부유식 원전 바지 AIP, 한화오션의 핵잠 추진계통 연구, K-조선이 가진 대형 선체·LNG선 경험 등이 ABS의 JDP·AIP 사례 안에 이미 등장해 있다. 즉, 표준 경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한국은 사실상 ‘첫 상업 파일럿이 가능한 국가’다.
이 때문에 ABS가 한국 국회에서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다. 규칙을 만드는 국제기구(IAEA·IMO), 규칙을 구현하는 선급(ABS), 시장 모델을 설계하는 민간 연합, 이를 사업으로 만드는 조선소·원전기업, 이 네 개 축이 하나의 국가 안에서 연결될 수 있는 사례를 찾고 있는 것이며, 그 자리로 한국이 선택됐다는 의미다.
한 줄로 압축하면 “기술이 아니라 표준과 시장 설계를 누가 쥐느냐”의 경쟁에서, 한국은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플레이어다. ABS가 한국 국회에서 메시지를 던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표준이 굳어지면 시장은 닫힌다는 것이 해양 SMR의 특성이다. ABS가 말한 “최근에는 안 했지만, 이미 해본 일”은, 다시 ‘한 번’ 규칙을 만들겠다는 의지이며 그 테이블에 한국을 부른 것이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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